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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밤새워 얘기 해요.
조회 143
회원이미지김은형
2008-03-29 11:31:01
 

이천 팔년 삼월 이십칠일 목요일


밤새워 얘기 해요.


 오늘은 건강관리위원회 아이들과 모임을 가졌다. 나는 사과와 쵸코파이 등을 가지고 교실로 갔다. 지난 토요일에 자신들이 주최한 축구대회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건강관리위원회 아이들의 사기는 높았다.

 “저는 진짜 여자애들은 한 명도 안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 나왔어요. 진짜 신기해요 여자애들은 축구하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잖아요.”

 위원장 대용이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모임이  시작되자마자 아이들은 다음 사업에 대한 구상으로 열기를 뿜었다.

 “다음은 농구대회를 하는 거야.”

 “아니, 야구를 하지.”
“족구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배드민턴, 탁구, 테니스..... 모든 운동 종목이 거론되었다.


 한참을 떠들다가 나는 준비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먼저 종이를 한 장씩 나눠주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마음속 얘기를 종이의 형태를 변형해서 표현해 보게 했다. 종이를 접거나, 그 위에 무엇을 그리거나, 접거나, 오리거나, 찢거나 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표현해 보는 것이다. 처음에 아이들은 나눠준 하얀 사갹형의 종이를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귀퉁이를 조심스럽게 접어볼 뿐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 속’을 잘 들여다보라‘는 주문이 반복되면서 조금씩 대담해 진다.

 내가 먼저 시범을 보였다. 나는 종이를 높이 들고 과감하게 한 번에 찢었다. 그리고 다시 또 한 번 찢었다. 약간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준 후 나는 말했다.

 “나는 틀에 박힌 생활이 싫다. 뭔가 새롭고 변화롭고, 진취적인 것이 좋다. 나는 올 해 십 년 만에 담임을 맡았다. 아이들과 함께 좀더 즐겁고 새로운 학교생활을 만들어가고 싶다.”

 아이들이 박수를 쳤다. 어색해서 팔을 동그랗게 움츠리고 있던 상근이가 조그맣게 말했다.

 “이미 선생님이 하시는 일들이 충분히 새로워요.”

 

 승엽이는 종이를 구겨 동그란 공을 만들어 쥐고 있었다.

 “공부하라고 끝없이 잔소리하는 엄마와 누나 때문에 짜증나서 종이를 마구 구겼어요.”

. 승엽이가 어떻게 하면 누나와 엄마의 잔소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에 대한 얘기들이 오갔다. 경환이도 종이를 조그맣게 찢어 뭉친 종이를 잔뜩 널어놓았다.

 “요즘 정신이 산만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경환이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것을 찾을 때까지 계속 질문을 던졌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하고 싶은 게 없다고 했던 경환이는 전에 배우던 기타를 다시 배우고 싶다고 했다.   향준이는 비행기를 타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어 비행기를 접었다. 우리는 또 외국 여행에 대해 한참 얘기했다. 대용이는 종이를 구겨서 뭉친 다음 다시 그것을 폈다. 하도 많이 주물러서 헝겊처럼 부드럽게 구겨진 종이는 새로운 형태를 띠고 있었다.

 “저는 우리 반 애들하고 재미있게 놀고 싶어요. 그런데 고등학교 문제, 공부 때문에 힘들어서 종이를 구겨버렸어요. 하지만 이미 이 종이는 종이가 아니에요. 우리 재미있게 지내요.”

 현우는 종이를 보석 모양으로 접고, 빛나는 광채를 포스트잇으로 모양을 붙였다.

 “일상적인 평범함을 벗어나, 보석처럼 빛나는 특별한 것을 해보고 싶어요.”

 “어떻게 지내야 재미있게 지낼 수 있지?”

 “과연 보석처럼 빛나는 특별한 일은 무엇일까?”

 내가 물었다. 아이들은 ‘야영, 수영장, 사우나, 자건거 여행, 댄스파티, 외국여행’ 등 함께 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쏟아낸다. 수영장 얘기가 나오자 여자애들은 절대 안갈거라며, 남자 애들의 검은 속셈이라고 스스로 자평하기도 한다. 나는 어떤 얘기가 나와도 모두 ‘좋아, 좋아! 가능한 건 다 해보자.’하고 맞장구를 치며, ‘언제갈까?’, ‘어디로 갈까? 하며 구체적으로 파고들어보기도 한다. 실현 가능한 일들은 많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하며 가능성을 다투는 유쾌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여섯 시가 넘어 정리를 하려고 하자 대용이는 더 얘기하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선생님, 우리 더 얘기해요. 네? 우리 모임 끝내지 말아요. 계속 계속 얘기해요. 재미있잖아요. 밤 새워 얘기해요. 아니 아홉시 까지만, 아니 여덟시 까지만....”

 학원에 꼭 가야한다는 우주만 빼고는 모두들 더 얘기해도 좋다고 갈 생각을 안한다. 이미 배가 고파서 쩔쩔 매면서도 말이다. 나도 점심을 일찍 조금 먹었던 탓에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학교 근처의 분식점에 가서 라면이라도 먹자고 하자 아이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하지만 대용이는 교실을 나가는 것을 불안해하며 또 조른다.

 “분식점 갔다가 다시 학교에 들어올 거죠? 아니면 가지 말아요. 그냥 굶어요. 그냥 굶고 얘기해도 좋아요. 다시 들어올 거죠? 예? 선생니임-”

 어린 애처럼 보채는 대용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편으로는 우습고,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다. 라면을 먹으면서 재미있게 얘기를 나누었는데 대용이는 계속해서 학교를 가야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일이 있어서 가야하니까, 저녁 먹고 아이들끼리 조금 더 얘기를 하고 가라고 하자

 “애들끼리 얘기하면 컴퓨터 게임에 대해서만 얘기 한단 말이에요.”

한다. 하지만, 내일은 고충두처리위원회가 기다리고 있고 다음 주에도 계속 저녁마다 모임을 가져야 한다. 모든 아이들과 매일 밤을 새울 수는 없다는 게 문제였다. 다음에 날을 잡아 우리 집에서 밤새워 애기를 나누기로 하고, 일곱 시 반이 되어서야 간신히 내 일을 보러 갈 수 있었다.


 이십 년 전이나, 십년 전이나 아이들은 언제나 대화다운 대화에 굶주려 있다. 나이 차이 때문에 아이들이 교사를 싫어할 거라는 생각은 절대로 진실이 아니다. 아낌없이 더 많은 것을 나누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아이들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행복하다.


 
 별4개  회원이미지안용순  2008-03-30 21:02    
국어교육의 목표인 의사소통 잘하기를 일상생활에서 실천하시는 선생님의 모습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모임에 은근하지만 깊은 말씀을 많이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별4개  회원이미지이상용  2008-03-31 17:34    
<서른 일곱 명의 애인>을 읽으며 교사 생활을 꿈꾸었던 사람입니다. 바라보며 꿈을 꿀 수 있는 선생님 같은 분이 계셔서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지... 교육일기를 이렇게 올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껴 아껴 읽으며 지금 있는 자리를 가꾸어 가겠습니다.
 별4개  회원이미지교사라행복해  2011-03-12 19:43    
교육일기 열심히 읽으며 감명을 받고 있습니다.
8년의 교직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이제는 학생들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게 맞다는 결론을 내렸었는데,
이런 기대는 하고 싶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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