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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찾기] 바루다와 네루다(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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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이미지허재영
2010-08-08 18:31:02

‘바루다’와 ‘내루다(네루다)’

 

허재영(단국대)

 

 

우리말에서 사동법은 문장의 주체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남으로 하여금 동작이나 행동을 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 스스로 행동이나 동작을 하면 ‘주동’이라고 하고, 다른 대상으로 하여금 동작이나 행동을 하도록 하면 ‘사동’이라고 한다.

국어의 구조나 표현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사동법’을 주체가 다른 힘에 의하여 움직이거나 행동하는 ‘피동’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파악하는 경우도 많다.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다른 힘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주체 스스로 행동하는 것을 ‘능동’이라고 한다. 곧 주동과 사동, 능동과 피동이 대립되는 문법 범주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사동과 피동을 대립하는 문법 범주로 파악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두 문법 범주를 실현하는 방법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사동 표현은 ‘시키다, 만들다’와 같은 어휘를 사용하는 방법, 동사에 접미사를 파생하여 사동사를 만드는 방법, ‘-게 하다’와 같이 보조 동사를 사용하는 방법 등이 있다. 이러한 방법은 피동 표현도 마찬가지인데, ‘당하다’와 같은 어휘를 사용하는 방법, 동사에 ‘-이-, -히-, -리-, -기-’를 붙여 피동사를 파생하는 방법, ‘-게 되다’와 같은 보조 동사를 사용하는 방법 등이 있다.

 

사동법과 피동법이 전혀 무관한 문법 범주라고 하더라도 두 범주의 실현 방법의 유사성은 언어의 변화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우리의 사동이나 피동을 실현하는 방법은 주로 접사를 파생하는 방법이었다. ≪세종어제 훈민정음≫에는 ‘사마다  수 니겨’라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에 쓰인 ‘’는 ‘이어’가 줄어든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에 ‘-이-’가 붙는 표현이나 ‘보-이-시니’(보게 하시니)의 ‘-이-’ 등이 모두 사동 표현에 해당한다.

그런데 접사 파생법에 따른 사동법이나 피동법은 점차 ‘-게 하다’나 ‘-게 되다’(이를 통사적 사동 또는 통사적 피동이라고 부를 수 있음)와 같은 표현으로 변화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접사 파생법과 통사적 방법이 동일한 의미를 갖지 않을 때도 있지만 빈도수로만 볼 때에는 파생법보다 통사적 방법에 의해 사동과 피동을 실현하는 경우가 훨씬 많아진다.

 

언어사의 일반적인 원리를 고려할 때 이와 같은 방법은 역사적인 흐름과는 역행하는 결과를 낳는다. 왜냐하면 언어사의 대표적인 명제 가운데 하나로 ‘어제의 통사론은 오늘의 형태론’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이 명제의 뜻은 일반적으로 여러 개의 단어를 모아 문장으로 전달하던 의미가 하나의 단어나 관용 표현으로 굳어지면서 간결한 표현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이 현상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에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름을 알지 못하는 어떤 사물을 처음 보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그 사물을 소개해야 한다면 복잡한 표현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물의 이름을 알고 있다면 간결하게 표현해도 의미 전달이 가능하다. 결국 이름(명사라는 단어)이 있었을 때와 이름이 없었을 때의 표현 방법이 다른 셈이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든 처음에는 이름이 없겠지만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이름을 붙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뿐만 아니라 언어의 역사와도 일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통사적 구조’가 ‘형태적 구조’로 변화한다는 언어사의 일반적인 흐름은 적절해 보인다.

 

그렇다면 형태론적 구조에 해당하는 접사 파생법의 사동이나 피동이 통사적 구조인 ‘-게 하다’나 ‘-게 되다’로 변화해 가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이에 대해서는 언어의 본질적인 기능에 해당하는 ‘변별력’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곧 의사소통을 위해서 서로 다른 말소리나 단어를 사용하여 의미를 구분해야 언어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이 문제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한 반에서 같은 성과 같은 이름을 갖고 있는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두 사람을 부를 때 키나 사는 곳 등 여러 가지 기준을 고려하여 두 사람의 이름 앞에 수식어를 붙인다. ‘큰 00’ 또는 ‘부산 00’ 등이 그것이다. 만약 ‘큰 00, 부산 00’이라고 표현한다면 한 단어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을 두 단어 이상으로 부르게 되는 셈이다.

사동법이나 피동법에 쓰이는 접사 가운데 ‘-이-, -히-, -리-, -기-’가 동일한 형태를 취한다는 점은 두 문법 범주의 변별력이 약화될 가능성을 짐작하게 한다. 예를 들어 ‘먹이다’와 ‘먹히다’는 같은 동사 ‘먹다’에 사동 접미사 ‘-이-’와 피동 접미사 ‘-히-’를 파생한 단어들이다. 모국어 화자라면 두 단어의 의미를 쉽게 구분할 수 있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예문] 이는 슬쩍 일어서서 옷깃을 바루고 고요히 문을 열고 나갑니다.≪최서해, 매월≫

 

이 예문의 ‘바루다’는 ‘바르-우-다’로 분석할 수 있다. 곧 ‘바르다’라는 형용사에 ‘-우-’라는 파생 접미사를 붙여 생성한 말이다. 얼핏 보아서는 잘못 쓴 말처럼 보이지만 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적절한 말이다.

 

예전에는 이와 같은 구조를 갖고 있는 말들이 매우 많았다. 정경세라는 사람이 쓴 ≪양정편≫이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타난다.

 

ㄱ. 낫흘 씨슬 에 슈건으로써 옷깃을 갈와 호위하고(낯을 씻을 때에는 수건으로 옷깃을 가려 호위하고)

ㄴ. 둥글게 팔장 질너 네루되 존쟝으로 더부러 읍할 앤(둥글게 팔짱을 질러 내리게 하되 윗사람과 더불어 읍할 때에는)

 

이 예문에 나오는 ‘갈와’는 한자 ‘차(遮:가릴 차)’를 번역한 것이며, ‘네루다’는 한자 ‘하(下: 내리다)’를 번역한 것이다. 곧 ‘가루다’는 ‘가리-우-다’로 분석할 수 있으며, ‘네루다’는 ‘내리-우-다’의 변이형으로 분석할 수 있다. (정확하게는 ‘내루다’로 해야 하지만 이 시기는 규범이 통일되어 있지 않으므로 글쓴이의 발음대로 ‘내’를 ‘네’로 쓴 것임) 두 단어 모두 오늘날 보기에는 매우 생소하다.

 

이처럼 접사 파생의 사동사에는 ‘바루다, 낮추다’와 같이 오늘날에도 널리 쓰이는 사동 표현이 있는가 하면 ‘가루다’나 ‘내루다’와 같이 생소해 보이는 표현도 있다. 물론 생소한 정도에 따라 사전의 등재 여부도 달라진다. ‘가루다’는 사전에 등재된 말이 아니며(사전에 등재된 ‘가루다’는 ‘가리게 하다’가 아니라 ‘자리 따위를 함께 나란히 하다’의 뜻), ‘내루다’는 경남 방언으로만 등재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북한말이다. 북한에서는 ‘자래우다, 깊히다’와 같이 남한에서는 쓰지 않는 사동사들이 비교적 많이 쓰인다. 남북한의 언어 차이가 언어 변화의 속도에 따라 생겨나는 예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북한말이 남한말과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말인데 변화의 정도가 다를 수 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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