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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을 이어준 우체부, 북방쇠찌르레기
조회 11
회원이미지구름의서쪽
2013-04-24 03:06:21
       

남과 북을 이어준 우체부, 북방쇠찌르레기

 1997년에 개봉한 영화 <아름다운 비행>에는 사람과 자연이 하나가 된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열세 살 소녀 에이미는 뉴질랜드에서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고 10년 만에 다시 만난 아빠 톰과 함께 캐나다로 돌아온다. 어릴 적 사진과 장난감이 그대로 남아 있지만 에이미는 자기가 태어난 집이 낯설게 느껴진다. 세 살 때 헤어진 아빠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서먹서먹하게 지내던 에이미는 집 옆에 있는 늪에 갔다가 야생 거위알을 발견한다. 개발하려고 늪지대의 나무를 마구 자르는 바람에 늪에서 서식하던 거위들이 쫓겨나고 알만 댕그라니 남겨진 것이다.

에이미는 거위알을 가져다가 헛간에 두고 따스한 손길을 쏟는다. 며칠 뒤 알에서 깨어난 열여섯 마리의 거위들은 에이미를 어미새로 여긴다. 거위는 부화할 때 처음 본 걸 어미로 알고 따르기 때문이다. 에이미는 거위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정해 주고 마치 엄마 거위처럼 새끼 거위들을 정성껏 돌본다.

거위는 먹는 법, 나는 법, 이동하는 법 등 모든 걸 어미한테 배운다. 그런데 어미새가 없어 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늦가을에 따뜻한 남쪽으로 이동할 수가 없다. 철새인 야생거위가 제때에 이동하지 못할 경우 집에서 키워야 한다. 하지만 야생거위를 집에서 기르려면 날개를 잘라야 한다. 이를 어기는 것은 불법이라는 얘기를 들은 톰은 거위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기로 결심한다.

톰은 먼저 거위가 양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모양처럼 생긴 경비행기를 만든다. 그 다음 에이미에게 비행기 조종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조종술을 다 익힌 에이미가 경비행기를 타고 이륙하자 거위들이 에이미를 따라 일제히 날아오른다. 에이미와 거위들은 4일 간의 비행을 마치고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800킬로미터 떨어진 미국의 해안 마을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다음 해 봄, 열여섯 마리의 거위 전부가 에이미에게 돌아왔다.

<아름다운 비행>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다. 영화 속에서 거위 소녀 에이미와 새끼 거위들이 노을이 지는 하늘을 줄지어 나는 장면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물아일체의 경지를 감동적으로 보여 주는 그 장면에서 에이미는 자신이 진짜 어미새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1992년에 북한과 일본이 처음으로 합작한 영화 <새>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영화는 15년 동안 헤어져 있던 북한의 아버지와 남한의 아들이 새 덕분에 생사를 확인하게 된 사연을 다루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 아버지와 아들은 각각 실존 인물인 원홍구 박사와 원병오 박사가 모델이다.

원홍구는 우리나라 최초의 관비 유학생으로 해방 이전에 조선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조류를 연구한 학자였다. 1888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태어난 원홍구는 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함흥 등지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동물 채집에 전념했다. 그는 특히 온갖 새들을 수집하고 정리해서 1934년 《조선 조류목록》을 발간했고, 《조선 조류지》, 《조선 짐승류지》 등 수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새 박사’로 유명한 원병오는 1929년 5월 19일 원홍구의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산과 들로 새를 쫓아다녔다. 그 덕분에 소학교 다닐 적에 새 이름 150개 정도를 달달 외울 수 있었다. 집에 조류 표본 4,000여 점과 나비도감을 가득 쌓아 놓고 있었던 원홍구는 나비 이름도 곧잘 외우던 막내아들을 유난히 귀여워했다.

원병오는 아버지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좋아했다. 그래서 자연과 동물, 책을 좋아하는 아버지를 늘 따라다녔다. 그는 여섯 살 때부터 아버지를 쫓아다니면서 새 공부를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아버지의 훌륭한 조수가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40년대에 5년 동안 살았던 함흥은 기름진 곳이었다. 쌀이며, 생선, 과일 등이 풍부했다. 거기서 오토바이를 타고 아버지와 사냥을 하러 가기도 했다. 하루에 20~30마리의 꿩이나 산토끼 등을 잡았다. 유년 시절에는 주로 곤충을 채집했고, 소년 시절에는 공기총으로 새를 잡았다. 소학교 때는 나비도감을 보고 나비 이름을 거의 외웠다. 조류도감을 보고 살다시피 해 조류도 150여 종을 알고 있었다. 그게 다 아버지의 덕이었다.”

1940년 여름에 원홍구와 원병오는 흥남 평야에서 새를 관찰하다가 북방쇠찌르레기를 발견했다. 그 전까지 북방쇠찌르레기는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 되면 한반도를 거쳐서 시베리아나 만주에서 번식하는 새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북방쇠찌르레기가 오동나무 줄기에 구멍을 뚫어서 만든 둥지를 발견한 것이다. 원홍구는 그 사실을 세계 조류학회에 보고하였고, 새 둥지를 발견한 그의 얼굴과 이름이 신문에 나왔다.

원병오는 1947년 김일성대학 농학부 축산과에 입학하였고, 1950년 7월에 원산농업대학(김일성대학에서 분리됨)을 졸업하였다. 그해 12월 4일에 원병오는 첫째 형, 셋째 형과 함께 월남하였다.(둘째 형은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서 사망하였다.) 김일성대학 교수이면서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이었던 아버지 원홍구와 어머니, 누나들은 북한에 남았다.

원병오는 한국전쟁 기간에 육군 포병장교로 참전했으며, 중위로 복무할 때 3군단 포병단장이었던 박정희 대령(후에 대통령)의 전속부관을 지냈다. 그는 육군 대위 출신이었지만 월남하기 전에 한 달 동안 인민군 생활을 한 전력 때문에 연구소나 학교에 근무할 때마다 수많은 신원보증을 받아야 했다. 또한 미수교국에서 열리는 국제학회에 참석하려면 수없이 많은 보증서를 내야만 했다.

피난 시절에 원병오는 미국학자가 쓴 《한국의 조류》라는 책에서 아버지의 연구 업적을 새삼 확인하고, 아버지를 만나는 길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새 연구를 결심한다. 1956년 초에 제대한 그는 농림부 중앙 임업 시험장(지금의 홍릉 수목원)에 취직했다. 그는 임시직으로 매우 적은 월급을 받았지만 오로지 야생 동물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일에 열중했다. 당시 임업 시험장에는 야생 동물에 대해서 이야기할 사람도 없었고, 책 한 권도 없었다. 원병오는 일단 박제 표본을 만들고, 헌책방을 찾아다니며 책을 구하기 시작했다. 때때로 월급을 몽땅 털어 책을 사기도 했지만 연구는 번번이 벽에 부딪쳤다. 그는 끝없이 고민하다가 책에서 본 일본 학자들에게 편지를 썼다. 자연에 대한 연구는 민족과 국가를 넘어서야만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편지에 한국에는 새의 종류와 생태를 알려주는 책이 거의 없고,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니 방법을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다고 썼다. 그리고 가능하면 좋은 책도 우송해 주면 고맙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답장이 왔다. “어렵더라도 좌절하지 마십시오. 힘이 닿는 대로 도와 드리겠습니다. 연구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고, 무조건 열심히 채집하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또 일본 학자들은 자신들이 쓴 연구 논문과 비싼 책까지 부쳐 주었다. 그 뒤에도 일본 학자들은 원병오가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56년 여름에 원병오는 서울의 홍릉 임업 시험장에서 북방쇠찌르레기를 발견했다. 당시에 그 새는 함경도나 평안도에 살 뿐이지 남한에는 살지 않는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원병오가 북방쇠찌르레기가 남한에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북방쇠찌르레기가 북한에 산다는 사실을 밝혀낸 사람은 아버지이고, 남한에도 산다는 사실을 밝혀낸 사람은 아들이었다.

새는 다른 동물보다 많이 움직이기 때문에 혼자 연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철새는 우리나라에서 번식하고 가을에 날아가는 새도 있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다가 잠시 쉬어가는 새도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살던 모습과 다른 나라에서 살던 모습을 함께 연구해야 한다. 또 새들이 어디로, 어떻게 이동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이를 혼자서 연구하고 알아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세계의 조류학자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모여서 회의를 했다. 그 회의에서 조류학자들은 가락지를 만들어 새의 다리에 끼우기로 결정했다.

가락지에는 저마다 고유의 표지가 있어서 어느 나라에서, 누가, 언제 보냈는지 알 수 있다. 가락지 재료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알루미늄을 가장 많이 쓴다. 아주 오래도록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알루미늄 가락지는 보통 6~7년 정도 쓸 수 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1903년부터 가락지를 달아 주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는 해마다 마흔세 나라에서 530만 마리 이상에 이르는 새에게 가락지를 달아 날려 보내고 있다.

원병오는 1963년부터 철새들의 이동을 연구했다. 주로 하는 일은 새를 잡아서 발에다 가락지를 달아 주는 것이었다. 새를 죽이지 않고 산 채로 잡아야 했기 때문에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그는 7년 동안 134종, 20만 마리의 새를 잡아서 가락지를 끼워 주었다. 그 안에는 북방쇠찌르레기도 들어 있었다.

초여름에 태어난 북방쇠찌르레기는 가을이 되면 남쪽으로 갔다가 이듬해 봄에 다시 찾아온다. 그런데 새들은 자기가 태어난 곳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다.

원병오는 1965년 초여름에 일본 도쿄의 국제조류보호연맹 아시아 지부에서 보낸 편지를 받았다. 여름 철새인 북방쇠찌르레기에 일제 알루미늄 가락지를 달아서 보낸 사실이 있는지 묻는 편지였다. 원병오는 그런 사실이 있다고 답장을 했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에는 가락지가 없어서 일본에서 가져다 썼다. 당연히 가락지에는 ‘JAPAN’이라는 글자를 적었다.

철새의 이동경로를 조사하던 원병오는 1963년에 새끼 북방쇠찌르레기의 다리에 ‘JAPAN C7655’라고 적은 알루미늄 가락지를 끼워서 날려 보냈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 새는 2년 뒤 서울로 돌아오지 않고 평양으로 날아갔다. 1965년 봄에 ‘C7655’는 평양 만수대 기슭의 숲 속에서 발견돼 북한과학원 생물학연구소 소장이던 원홍구에게 보내진다. 그는 일본에 살지 않는 새의 다리에서 일제 가락지를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일본 조류학자들에게 문의했던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원홍구에게 ‘C7655’는 남한의 조류학자 원병오가 보낸 새라고 알려 주었다. 두 사람은 일본 조류학계의 도움으로 마침내 서로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남북의 부자 조류학자가 15년 만에 새를 통해 생사를 확인했다는 내용은 소련의 프라우다, 북한의 노동신문을 거쳐 미국과 일본의 신문에 크게 보도됐다.

북한 작가 임종상은 원홍구 가족의 이야기를 토대로 <쇠찌르레기> 라는 소설을 썼다. 1992년에는 북한과 일본이 합작해 영화 ‘새’를 제작했다. 북한 당국은 이들의 사연을 담은 기념우표를 발행했고, 중학교 영어 교과서에 <아들로부터 온 새>란 글을 실어 이 사연을 소개했다.

영화 ‘새’에서 북의 조류학자 아버지와 남의 조류학자 아들은 일본에서 열리는 조류학회에 함께 초청받지만 남북의 입장 차이로 부자 상봉이 무산된다. 현실에서도 아버지 원홍구와 아들 원병오의 만남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꿈에도 잊지 못하던 막내아들 이름을 부르며 1970년 10월 3일 눈을 감았다. 아들은 일본 학자의 전보로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북쪽을 향해 절하며 울었다. 그로부터 3년 뒤 원병오의 어머니는 철새 다리에서 떼어낸 가락지를 어루만지며 흐느끼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어머니의 부음은 사망 6년이 지난 뒤에야 국제학회에서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당시의 일을 회고하면서 “철새는 남북을 자유롭게 오가며 북녘의 부모님 소식을 전해 주었는데 사람은 서로 만나지 못한다는 게 가슴 아팠다.”라고 말했다.

원병오는 1989년에 김일성 주석의 초청장을 받았으나 우리 정부가 “북한의 정치선전에 이용될 수 있다.”며 방북을 허락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 2002년 4월 방북한 독일의회 대표단을 통해 북측에 성묘와 학술 교류를 원하는 편지를 전달했고, 5월 17일 북한 동물학회의 초청장을 얻어냈다. 그는 방북에 앞서 “북한 대학에서 강의하고 남북한 학술 교류에도 기여하고 싶다.”면서 “새들처럼 자유롭게 왕래할 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원병오는 2002년 6월 22일부터 7월 6일까지 북한을 방문했다. 그는 김일성종합대학과 원산농업대학, 평양 동물원, 부모 묘소가 있는 평양 애국열사릉 등을 둘러봤다. 그리고 평양에 살고 있는 조카들의 아파트에도 들러 정을 나누었다. 그들이 사는 집은 남한의 낡은 아파트와 비슷했고 조카들은 생기발랄했지만 윤택하게 살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매달 쌀 한 가마라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방북 기간에 북한의 동물학연구소는 그에게 아버지가 가장 아끼던 표본이라며 백두산 특산 조류인 멧닭 한 쌍을 선물했다. 그 표본은 지금 경희대 자연사박물관에 진열돼 있다.

표본을 볼 때마다 아마 그는 남북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새가 부러웠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자신이 행복한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원홍구가 사망한 뒤에 열린 국제회의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화장실에서 눈물을 흘리는 원병오에게 평소 가깝게 지내던 외국의 조류학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도 원 선생님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새 덕분에 부모님 소식이라도 들었잖아요? 지금도 부모님 소식을 몰라 제사상도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처럼 남과 북을 오가며 우체부 노릇을 하는 새가 없는 이산가족의 눈물은 도대체 누가 닦아 줄 수 있을까?

그들의 아픔을 달래주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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