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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모습으로 잠시 우리 곁에 머물렀던 성자
조회 18
회원이미지돌돌이
2013-03-30 16:10:58
       

사람의 모습으로 잠시 우리 곁에 머물렀던 성자

-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사람, 이태석 신부

“여기 수단은 한국에선 볼 수 없는 정말 아름다운 것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너무도 많아 금방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이고 다른 하나는 손만 대면 금방 톡 하고 터질 것 같은 투명하고 순수한 이곳 아이들의 눈망울이다.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고 있으면 너무 커서 왠지 슬퍼지기도 하지만 너무 아름다운 것을 볼 때 흘러나오는 감탄사 같은 것이 마음속에 연발됨을 느낄 수가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이태석 신부가 2007년 10월에 쓴 글이다. KBS의 구수환 피디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고 한다.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잠시 머물렀던 성자’ 이태석 신부는 1962년 9월 19일 부산에서 10남매 중 아홉 번째로 태어났다. 이태석 신부의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일요일마다 성당에 다녔다. 이태석은 형제들 중에서 유독 성당에서 놀기를 좋아했다. 성당에는 그가 좋아하는 풍금과 기타가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고 노래를 잘했던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맑고 깨끗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이태석이 아홉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태석의 어머니는 낮에는 자갈치 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고 밤에는 삯바느질을 하며 10남매를 키웠다. 어머니가 아침 일찍 나가 새벽에 들어오면 아이들은 청소와 빨래를 다해 놓았고, 엄마 밥 한 그릇을 따로 담아 아랫목에 넣어 놓았다. 그중에서도 이태석은 일하는 솜씨가 야무진 아들이었다. 설거지를 할 때도 어머니가 자주 사용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해서 정리해 놓았고, 빨래한 옷은 세워서 정리해 한눈에 찾기 쉽게 해 놓았다.

이태석은 약한 사람을 보살피는 마음씨를 가진 아이였다. 아이들이 놀이에 끼워주지 않아 외롭게 있는 친구를 보면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다. 주로 장애가 있는 친구들이었다. 종종 누나와 함께 걸어가다가 고아원 앞을 지나면 한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물끄러미 고아원 안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곤 했다. 누나가 가자고 해도 꼼짝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태석은 “누나, 우리 나중에 크면 고아원 차리자.”라고 말했다. 또한 유난히 아이들을 좋아해 커서도 조카들이 집에 놀러오면 데리고 노는 것은 언제나 이태석의 몫이었다.

이태석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성당에서 다미안 신부(1840~1899년)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보여 주었다. 이태석은 두 살 터울의 형 이태영과 함께 성당에 가서 영화를 보았다. 다미안 신부는 벨기에 출신으로 하와이 몰로카이 섬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다 자신도 한센병에 걸려 선종했다.

1885년 어느 날 밤, 피로를 풀려고 목욕물을 끓인 다미안 신부는 실수로 뜨거운 물을 양말도 신지 않은 발등에 쏟았다. 그런데 통증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그의 얼굴은 점차 흉측하게 일그러져 갔다. 다미안 신부는 한센병에 걸린 후 한센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어졌다고 했다. 1873년부터 1899년까지 17년 동안 한센인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바쳤던 다미안 신부는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선교사라고 했다. 몰로카이 섬의 다미안 신부 기념비에는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말이 적혀 있다. 2009년 로마교황청은 다미안 신부를 성인으로 추대했다.

다미안 신부의 삶은 두 형제의 가슴속 깊이 스며들었다. 이태석의 둘째 형 이태영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다미안 신부님의 삶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어요. 그러나 동생 태석이는 영화를 본 후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저도 그 영화를 보고 성직자의 길을 걷고 싶은 마음이 생겼는데, 동생도 비슷하게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태석은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어떤 종류이든 악기만 보면 이태석의 가슴은 설레었다. 악기 중에서도 특히 그를 설레게 만든 것은 피아노다. 피아노 선율을 처음 듣고는 맑고 깊은 피아노 소리에 푹 빠져버렸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도 강렬했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성당에 가면 피아노는 아니지만 풍금을 칠 수 있었다. 이태석은 성가책을 교본 삼아 혼자서 매일 연습을 했고 몇 달 후에는 어린이미사 반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태석은 초등학생 때부터 쉬운 곡들을 작사 작곡 했으며,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음악경연대회에서 성악 부문 장려상을 받았다. 변성기에 접어든 후에는 같은 대회에서 작곡 부문 대상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작곡 실력을 갖춘 이태석은 중학교 3학년 때 ‘묵상’이란 곡을 만들었다. ‘묵상’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과 전쟁으로 피를 흘리는 사람들이 안타까워 만든 노래이다. 이 곡은 음악성을 인정받아 가톨릭 성가집에 실려 있다.

이태석이 경남 고등학교에 다닐 때, 간호사로 일하던 넷째 누나 이영숙은 ‘마리아 사업회’라는 단체로 들어가 평생 봉사하며 살겠다고 집을 떠났다. 둘째 형 이태영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하겠다는 결심을 어머님께 말씀 드렸다. 어머니는 신부가 되겠다는 둘째 아들을 말리고 또 말렸지만 이태영의 뜻은 확고했다. 1979년 1월 한센인을 돕는 일을 하려고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한 이태영은 1989년 1월 사제서품을 받았다.

어머니가 눈물로 형을 떠나보내는 것을 보면서 이태석은 신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접었다. 어머니에게 똑같은 상처를 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진로를 고민하던 이태석은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때문에 삯바느질로 10남매를 키우는 어머니를 보면서 호강시켜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고, 검은색 수도복을 입을 수 없다면 흰색 가운을 입고 아프고 외로운 사람들을 돌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1981년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한 그는 신경외과를 전공했다.

1987년 이태석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들어가 군의관으로 일했는데 제대를 4개월 앞두고 소속 부대를 옮기게 되었다. 부대 앞에 있는 성당에서 잠도 재워 주고 식사도 무료로 제공해 준다는 얘기를 듣고 이태석은 군생활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그가 머물렀던 성당의 황용연 신부는 마흔이 넘어 신학 공부를 시작해 뒤늦게 사제서품을 받은 늦깎이 신부님이었다. 이태석은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했던 신부님에게 많이 의지하게 되었고, 부제품(사제서품을 받기 전 첫 단계 품)을 받은 수도사들과 가깝게 지내며 많은 자극을 받았다. 훗날 그는 가족들에게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늘 어딘가 한구석 비어 있던 마음이 꽉 차는 기분이 들었다.”며 “그때 신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태석의 결심을 들은 어머니는 “그때 처음 평생 의지하고 섬겼던 하느님이 원망스러웠다.”고 한다.

이태석의 어머니는 봉사를 하고 싶으면 의사가 돼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차라리 벽촌 같은 데 가서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을 도와주라고 했다. “의사가 아니어도 좋다. 왜 하필 신부가 되려고 하느냐.”며 몇 날 며칠을 울면서 타이르고 말렸다.

하지만 이태석의 뜻을 꺾을 수 없었던 어머니는 결국 눈물로 아들을 품에서 떠나보냈다. 이태석은 1991년 살레시오회에 입회하였고 1992년 광주 가톨릭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살레시오회는 신부님과 신학을 공부하는 수도사들이 부모가 없거나 가난한 청소년들과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다. 아이들과 친구처럼 어울리기를 좋아했던 이태석에게 꼭 맞는 곳이었다. 그는 가톨릭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로마에 있는 살레시오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이태석은 신학 공부를 시작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곳을 직접 찾아 나섰다. 1999년 8월, 이태석이 처음으로 간 곳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였다. 하지만 나이로비의 정돈된 도시 모습은 그가 떠올리던 아프리카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 실망스러웠다. 때마침 수단에서 20년 가까이 선교 활동을 해온 인도 출신의 제임스 신부가 그를 찾아왔다. 제임스 신부는 생필품을 사기 위해 케냐로 나왔다가 의대 출신 신학생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태석을 만나러 온 것이다. 제임스 신부는 그에게 “진짜 아프리카를 보고 싶다면 수단으로 가야 한다.”며 함께 갈 것을 권했다.

1956년 영국에서 독립한 수단은 북수단의 아랍계 이슬람 세력과 남수단의 원주민 반군이 1983년부터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태석이 도착한 곳은 남수단의 톤즈라는 마을이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거리에는 팔이나 다리가 없는 사람이 많았다. 아이들은 더러운 흙탕물을 꿀꺽꿀꺽 마셔댔다. 이태석은 씻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나는 고약한 냄새와 더위 때문에 사흘 동안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진짜 아프리카의 모습은 너무나 처참하고 끔찍했다.

이태석은 제임스 신부에게 한센병 환자 수용소가 있느냐고 물었다. 제임스 신부는 그를 톤즈에 있는 한센인 마을로 데려갔다. 쓰러져 가는 움막, 터진 고름에서 진동하는 악취, 성치 않은 손과 발, 더욱이 신경이 마비돼 아픈 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 이태석은 처음 수단에 갔을 때 전기에 감전된 듯한 충격으로 며칠을 멍하게 지냈다고 고백했다.

2001년 6월 24일 의사 이태석은 사제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었다. 사제서품식에는 어머니도 참석해 아들의 앞길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다. 수단에 가서 살기로 결심한 최초의 한국인 신부 이태석은 2001년 11월 톤즈로 떠났다.

한낮의 기온이 섭씨 50도를 오르내리는 수단은 전염병이 많은 곳이다. 딩카족이 사는 톤즈에는 말라리아와 콜레라, 결핵, 장티푸스 등의 병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태석 신부는 톤즈에 진흙과 대나무로 지은 세 칸짜리 움막과 달랑 침대 하나뿐인 진료소를 열었다. 그는 진료를 받기 위해 30~40킬로미터를 밤새도록 걸어와서 아침 일찍 진료소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환자들을 볼 때면 가슴이 뭉클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진료소에 올 수도 없을 만큼 중증이거나 깊은 숲속에 사는 환자들을 위해 1주일에 한두 번 80여 개의 마을로 이동진료를 나갔다.

영양 상태만 좋으면 쉽게 이길 수 있는 말라리아나 홍역으로 죽어가는 톤즈 사람들을 보며 이태석 신부는 병원을 짓기로 결심한다. 2004년 5월 진료실, 검사실, 입원실, 약 보관실이 있는 열두 칸짜리 병원이 완성되었다. 이태석 신부는 매일 새벽 5시 45분에 일어나 미사를 드리고, 병원에서 매일 2백 50명이 넘는 환자를 손수 돌봤다. 환자의 증상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 딩카어도 열심히 공부했다. 톤즈에는 그를 만나면 살 수 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5일 동안 100킬로미터를 걸어온 아이와 아버지도 있었다. 밤에 찾아오는 환자는 여러 날을 걸어왔거나 총상을 입은 응급 환자들이다. 그는 한 번도 그들을 돌려보낸 적이 없었다.

이태석 신부는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실천했다.

수단에는 가족에게 버림받고 허술한 움막집에서 하루하루 목숨을 이어 가는 한센인들이 많았다. 톤즈에 있는 한센인(나병 환자) 마을은 이태석 신부가 틈만 나면 들르던 곳이었다. 이태석 신부가 찾기 전까지 그들은 자신의 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죽어갔다. 이태석 신부는 건물 네 채를 지어서 한센인들이 모여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병의 진행을 막는 치료제도 구해 주었다. 또한 버려진 땅에 나무를 베어내고 우물을 파서 경작할 수 있는 땅을 만들어 주었다. 그는 한센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유일한 외부 사람이기도 했다.

한센병에 걸리면 감각 신경이 마비되어 손발에 날카로운 것이나 뜨거운 것이 닿아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살갗이 자주 찢어져 뼈가 드러나고, 고름이 터져서 악취가 났다. 이태석 신부는 맨손으로 한센인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이태석 신부가 고름을 짜고 붕대를 감아 주었지만 맨발로 다니는 한센인들의 몸은 늘 상처투성이였다. 상처 부위는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면 썩어서 잘라내야 한다. 이태석 신부는 그들의 발에 꼭 맞는 신발을 만들기 위해 한 사람씩 도화지에 발을 올려놓고 발 모양을 직접 그렸다. 그 그림을 케냐 나이로비에 보내 잘 닳지 않도록 가죽으로 샌들을 만들었다. 한센인들에게 세상에서 하나뿐인 자신만의 신발이 생긴 것이다.

톤즈에 있던 학교는 2001년 9월에 북수단의 폭격을 맞아 흔적만 남아 있었다. 학교를 잃어버린 아이들은 하루 종일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때우곤 했다. 이태석 신부는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까, 성당을 먼저 지으셨을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톤즈 주민들과 함께 골격만 남은 학교 건물을 보수해서 교실로 만들었다. 교사들은 케냐에서 자격증이 있는 사람을 선발해서 데려왔다. 톤즈에서 처음으로 우리나라 초중고 과정에 해당하는 12년 과정 정규학교가 세워졌다. 그는 진료가 없는 시간에는 고등학교 수학을 직접 가르쳤다.

2005년 1월 남수단과 북수단은 마침내 전쟁을 끝내고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2백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남수단 사람들에게는 꿈에도 그리워하던 평화였기에 축제가 몇 주간이나 이어졌다. 하지만 재산목록 1호인 소를 둘러싼 부족 간의 충돌은 수단의 평화를 위협하는 불씨로 남아 있었다. 소와 관련된 문제로 가족이나 부족 중에 한 사람이 상처를 입거나 살해를 당하면 경찰과 군인들도 못 말릴 정도의 큰 싸움으로 번졌다.

남수단은 장기간의 전쟁으로 건물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마음도 상처 받고 부서져 있었다. 이태석 신부는 상처 받은 아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씨앗을 심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생전 처음 들어보는 아이들에게 피리와 기타, 오르간을 가르치는 것이 많이 어려우리라 생각했지만 예상 밖으로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몇몇은 피리는 물론이고 기타를 배운 지 하루 이틀 만에 노래를 불러가며 제법 빠르게 쳐대기 시작했고, 일주일 만에 양손으로 오르간을 연주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2005년 남수단 최초로 트럼펫, 트롬본, 클라리넷 등의 악기들로 구성된 35인조 브라스밴드가 탄생했다. 총 대신 악기를 든 아이들의 등장은 남부 수단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중요한 행사를 치르는 장소에는 항상 그들이 있었다. 남수단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에도 초청을 받았다. 대통령은 아이들의 연주를 보고 미국에서 온 밴드인 줄 알았다며 놀라워했다.

2008년 10월 이태석 신부는 2년 만에 휴가를 맞이하여 한국에 돌아왔다. 그는 몸 상태가 이상하다고 느껴 병원에서 건강 검진을 받았다. 정밀검사 결과 대장암 말기였지만 정작 그가 걱정한 것은 자신의 건강이 아니라 수단의 아이들이었다. 암 판정을 받은 이태석 신부는 “우물을 파다 말고 왔는데, 열흘 있다 수단에 가야 하는데……. 아이들이 기다리는데…….” 하며 망연자실하였다. 살레시오회에서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아이들과 얘기하기를 좋아했던 이태석 신부는 2010년 1월 14일 새벽 5시 35분에 선종했다. 2011년 1월 선종 1주기에 즈음하여 이태영 신부는 “가장 아름다울 때 데려가신 것은 그의 삶 앞에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라고 말했다.

2009년 12월 17일에 열린 ‘한미 자랑스런 의사상’ 시상식에서 이태석 신부는 다음과 같이 수상 소감을 밝혔다.

“저는 전문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들처럼 특별한 백신을 개발한 것도 아니고, 단지 내세울 것 없는 자그마한 의술로 병원이 없는 곳에서 원주민들과 몇 년 살았을 뿐인데……. 제 것도 아닌 상을 몰래 훔쳐가는 느낌에 죄책감마저 듭니다.

…… 저는 진료하기 전 1~2분은 환자의 눈만 바라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의사와 환자의 만남 이전에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진실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질병 치료를 위한 단순한 만남이 아닌, 고귀한 영혼과 영혼의 만남으로 승화시키는 의사가 되시길 바랍니다.”

2011년 2월, 이태석 신부가 떠난 후 브라스밴드를 이끌고 있는 제임스는 톤즈를 방문한 구수환 피디를 마을 성당 운동장으로 데려갔다. 날이 어두워질 시간이었지만 그곳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주민들의 박수 소리와 함께 하얀색 와이셔츠를 입은 학생들이 피리를 연주했다. 연주하는 노래가 ‘사랑해 당신을’이었다. 연주에 맞춰 아이들이 몸을 흔들며 한국말로 노래를 불렀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살레시오 수도회의 지아코모 코미노 수사는 1960년부터 33년 동안 한국에서 가난한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스승이었고 그들의 아픔을 다독여주는 아버지였다. 1992년, 경제성장으로 한국의 생활 여건이 나아지자 그는 자신의 도움이 더 절실한 아이들을 찾아간다며 북수단으로 떠났다. 2005년, 남수단과 북수단의 평화협정 체결로 총성이 멈추자 그는 톤즈에 가서 이태석 신부와 오랜 시간을 같이 했다. 코미노 수사는 구수환 피디에게 “이곳에서 5년을 있었는데 아이들이 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죽어도 절대로 울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구수환 피디는 톤즈 아이들에게 이태석 신부의 생전 모습과 마지막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이들의 얼굴이 화면에 따라 변해갔다. 암 투병 중인 신부의 얼굴이 보이자 모두 괴로운 듯 고개를 떨구었다. 시신을 운구하는 행렬이 보이는 순간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고 아이들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렀다.

영화 <울지마, 톤즈>는 이태석 신부가 ‘열애’를 부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한세월 그대와 함께 하나니 그대의 가슴에 나는 꽃처럼 영롱한, 별처럼 찬란한 진주가 되리라 그리고 이 생명 다하도록 이 생명 다하도록 뜨거운 마음속 불꽃을 피우리라 태워도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 진주처럼 영롱한 사랑을 피우리라”

2011년 12월 15일 오후 5시 30분 바티칸에서 <울지마, 톤즈> 시사회가 열렸다. 영화가 끝난 뒤 교황청 국무원장 타르치시오 베르토네 추기경은 이태석 신부의 고귀한 삶에 경의를 표했다.

“이태석 신부의 해맑은 미소와 가득한 향기는 하느님의 사랑을 그대로 보여준 것입니다. 이제 그가 남긴 사랑은 국경을 넘어 전 세계에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가 뿌린 작은 불씨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크게 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 불꽃을 마음속에 지니고 사랑과 자비로움이 항상 우리의 삶 속에서 반짝거림으로 남아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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