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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는국어교사를위한10가지수업방법-04최용석샘강좌후기
조회 16627
회원이미지이성수
2009-05-21 13:55:18
       

오늘은 성공하는 국어수업을 위한 열 가지 수업방법의 네 번째 강좌 최용석 선생님의 '소설쓰기 강좌' 후기를 올립니다. 일주일이나 묵혔다가 쓴 글이라서 기억이 오락가락하니 사실과 다른 부분이 충분히 많을 듯 합니다. 이해하고 보아주시길. 덧붙여 고백하자면, 사진을 안 찍어서 함께 올릴 사진이 없어요...최용석 샘에게 더더욱 죄송해요...(혹시 누구 사진 찍으신 분 있으면 올려주세요 ㅠ.ㅠ)

문화계에는 ‘구라’, ‘노가리’, ‘야부리스’ 따위의 말빨 등급이 있습니다. 말빨이 센 순서대로 보자면, ‘구라’는 말빨계의 지존입니다. 남들이 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것이 이 분들 입에 걸리면 ‘그럴듯한’, 아니 ‘실감나는 실화’로 탈바꿈하기도 합니다. 요즘 한창 세간에 오르내리는 소설가 황석영 씨가 ‘황구라’로 유명합니다(이 별명이 그럴듯하긴 합니다. 요즘 말도 안되는 소리를 그렇게 서슴지 않고 주워섬기시는 걸 보면 말이죠).

그 다음에 오는 것이 ‘노가리’인데, 살짝 말이 안 되는 소리인 듯 싶다가도 고개를 끄덕끄덕이게 할 정도의 말빨 수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화가 박재동 씨가 이 언저리를 맴돌고 계십니다. 그 다음이 ‘야부리스’인데 이건, ‘니가 하는 말이 말도 안 되긴 하지만, 들어줄만은 하구나’하는 수준이라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실상은 들통이 나더라도 그래그래 하고 맞장구 쳐줄 정도의 말빨 수준이라고 보면 되겠지요.

국어 선생이라고 하면 말빨이 센 분들이 제법 많을 듯 합니다. 샌님처럼 말하는 걸 어려워하시는 분도 물론 계시지만, 아무래도 말과 글을 다루는 이들이니 말빨 세울 수 있는 분들이 여럿 계시는 것도 사실이지요. 우리 국어교사모임 안에서 말빨의 지존으로 내세울 수 있는 분은 누구일까요?

모임 선생님들이 다들 겸손하셔서 ‘구라’ 경지에 내가 와 있노라 하고 나서실 분은 없으실 것 같습니다. 그저 다들 ‘노가리’와 ‘야부리스’ 수준이라고 아니면, 그 수준도 아니라고 자신을 낮추시기만 하는 것 같네요. 그런 와중에 이번 ‘성공하는 국어수업을 위한 10가지 수업방법’의 강사로 참여하시는 분들은 다들 ‘한 말빨’ 하시는 분들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 오늘은 그중에서도 자칭타칭 ‘야부리스’의 대가이신 최용석 선생님의 소설 강좌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최용석 선생님의 소설 강좌 서두는 ‘이 강좌는 구라다’입니다. 소설이 허구인만큼, 그런 소설을 바탕으로 풀어내는 자신의 이야기도 허구일 수 있다는 말인데, 실은 이야기로 전해듣는 수업 사례에는 듣는 사람이 알지 못하고 상상력으로 채울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으며, 그런 빈 자리를 자신이 얻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로 채워가라는 주문일 것 같습니다.

1. 소설 쓰기의 시작, ‘놀면서 가르치기, 날로 먹기’

소설쓰기를 왜 시작했나.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놀고 먹으려고. 최용석 선생님이 줄기차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수업을 편하게 하려고 궁리하다보니 이런 수업이 가능했다. 2, 3주에 걸쳐 소설을 쓰라고 아이들에게 소설쓰기를 맡겨놓고 나는 <죄와 벌>을 읽었다. 아이들은 소설을 쓰느라고 고생고생이었지만, 나는 소설 속에서 즐거웠다. 아이들이 써낸 소설을 읽어보면, 잘 쓰는 놈은 가르치지 않아도 잘 쓴다. 내가 가르친 적이 없지만, 누가 물어보면 내가 가르친 척 했다. 아이들에게 애써 가르치지 않아도 읽고 싶은 좋은 작품이 나온다. 이런 수업을 왜 마다하겠냐. 계속 해야지.”

여기까지만 들으면 소설쓰기 수업은 누구나 말 한 마디로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야! 써!” 그렇게 던져놓고 자기 자신은 여유롭게 소설책 한 권을 잡고 앉아 있는 국어교사라니. 말만 들어도 꿈꾸던 모습이 아닙니까?

하지만, 그런 말은 사실 ‘구라’에 지나지 않습니다. 뒤이어지는 최용석 선생님의 말.

“남들이 잘 가르친다 잘 가르친다 하니까 내가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를 보여줘야 하는데,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중에 나와 있는 소설쓰기와 관련된 단행본 40종 정도를 싹 흝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중학교 수준으로 재구성했습니다. ‘고도의 짜깁기’를 한 거죠.”

이것 보십시오. 바로 앞에서 한, 손 안대고 코풀고, 날로 먹기 정신으로 수업을 한다는 말은 말짱 거짓말입니다. 수업을 위해서 단행본 40권을 들고 가져다가 독파하는 교사. 그게 날로 먹는 건가? ‘구라’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이건 목숨 걸고 공부하는 교사가 아닌가요? 그럼, 수업을 날로 먹고자 했던 교사가 왜 그렇게 목숨 걸고 공부하는 교사의 모습을 하게 된 것일까요? 최용석 선생님을 홀린 무언가가 있지 않겠습니까?

“교육과정상의 창작 수업 목표를 보면 ‘문예창작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부차적인 활동’ 정도의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도해보신 분은 알 겁니다. ‘창작은 어떤 것을 위한 부차적인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창작은 그 자체가 목표가 되는 겁니다.”

아이들과 자꾸 소설쓰기를 하면서 창작 수업의 미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생활의 발견’ 바로 그겁니다. 박경리 선생님께서 창작은 ‘암흑 속을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하신 말이 있는데 딱 그 말이 맞습니다. 논리 본능이 실종된 아이들에게 ‘왜’를 끊임없이 던지면서 자기 삶을 들여다보게 하고 자기 가치관을 찾게 하면서 소설 쓰기 시작됩니다.”

이제서야 바른 소리를 하십니다. ‘창작’의 기쁨, ‘창작이 가진 힘’을 한 번 맛본 사람은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법이지요. 아마도 최용석 선생님은 수업 속에서 그런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았으리라고 봅니다. 그것이 최용석 선생님이 소설쓰기 수업에 빠져들게 된 이유이겠지요. 그리고 그런 경험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자신의 수업 방법을 체계화한 것이 바로 오늘의 강의 내용일 겁니다.

“교육은 적절한 절차를 거치게 해야 하고, 그 절차를 거치면 일정 수준의 결과물이 나오는 일련의 과정입니다. 소설 쓰기 수업도 교육의 일환이라면 적절한 절차가 필요합니다. 그 절차를 만들어간 과정을 오늘 함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2. 우연과 필연

“소설 창작은 우연에 필연의 옷을 입히는 과정입니다. 14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떨어지는 아이를 어머니가 밑에서 받아낸 사건. 현실에서는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몰라도, 소설 속에서 그것이 가능하려면 어머니가, 아이가 어떻게 어느 시간에 왜 그렇게 움직였는지가 설명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소설입니다.”

“현실에서는 가능하다고 해도 소설에서는 우연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소설은 반드시 필연으로 구성되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소설의 속의 논리를 만들어 가다보면, 어느 순간 피노키오가 제페트 영감의 손에서 벗어나 스스로 움직이듯이, 작가는 소설 속의 인물들을 지켜보는 존재가 됩니다. 작가가 창조자의 위치에서 관찰자, 기록자의 위치로 옮겨가게 됩니다. 피노키오가 자기 줄을 끊어내는 그 순간, 그 순간을 지켜보기 위해 창작을 하고, 창작을 가르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14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떨어지는 아이를 아파트 정원에서 어머니가 받아듭니다. 이런 소설 같은 일이 가능하려면 어떤 이야기가 만들어져야 할까요? 제 머리 속으로 ‘음... 어머니가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어. 쓰레기 수거장으로 가는데 아이가 떨어지는 걸 봤어...그래서 달려가 받았어..’ 뭐 이런 식의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최용석 선생님이 한 마디 합니다.

“9.8m/sec인가요? 물체 낙하 속도가? 14층 아파트면 대략 어느 정도의 높이인가요? 사람이 얼마나 빠르게 달릴 수 있지요? 이런 것들을 계산해보면 아이가 떨어지는 시간은 3초 내외, 그리고 그 시간에 사람이 달릴 수 있는 거리 안에 어머니가 와 있어야 합니다. 물리적 법칙을 거스르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야기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습니다. 그저 이야기나 지어내면 그 뿐인 줄 알았던 소설이 사실은 정교한 건축물이라는 걸 이렇게 보여주십니다. 그런 정교한 건축물을 지어올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아마도 세심한 관찰이 그 바탕일 것 같습니다. 100m 달리기를 하는 소녀의 모습, 그 소녀의 머리가 깻잎머리라면 어떤 모습으로 뛰어야 할까요? 그 모습을 상상해보실 수 있겠습니까? 최용석 선생님은 강의 자리에서 직접 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평소 관찰하고 기억한 것이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것이죠.

그 다음에 오는 것은 ‘왜?’라는 끊임없는 질문입니다. 아이들에게 소설 쓰기를 가르칠 때에 ‘왜?’가 세 번 이상 이어질 수 있도록 논리를 만들어가라고 한답니다. 그렇게 ‘왜’를 계속 묻게 되면 이야기 속에 그 아이의 생각과 가치관이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한다고도 하네요.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웠어 -> 왜? - ① 싸울만하니까 싸웠겠지 -> 소설이 안 되지요

                                  ② 회사에서 돈을 안 줘서 -> 사회소설이겠네요

                                  ③ 누가 바람을 피워서 -> 치정극이 되겠네요

X는 병국이의 국어활동지를 훔쳐갔다. 왜 그랬을까?

① 병국이에게 심술이 나서 -> 왜?

② 활동지를 복사를 안 해줘서 -> 왜?

③ 병국이랑 X는 라이벌이기 때문에 -> 왜?

④ 병국이 엄마랑 X의 엄마는 라이벌이라서 -> 왜?

⑤ 옛날에 병국이 엄마랑 X의 엄마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갈등을 빚었거든

이렇게 ‘왜’를 자꾸 던지면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그 이야기를 가다듬으면 소설이 됩니다.

3. 소재와 구성하기

그럼 무엇을 쓸까요? 소설을 무턱대고 쓰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무엇을 써야하는가 하는 질문에 최용석 선생님이 제시하는 비법은 ‘버리기’입니다.

“일단 50가지의 소재를 쓰라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마음에 안 드는 것 25개를 골라 버립니다. 다시 거기서 반을 버리고, 버리고, 버리고 버립니다. 맨 마지막에 남는 하나. 그걸 써야 합니다.”

“이 방법은 무얼 고르는 것보다 훨씬 더 절실하게 자기 마음을 드러냅니다. 심리학 기법으로 많이 쓰입니다. 제가 직접 해보니까 정말 환장합니다. ‘제일 사랑하는 것 10가지’를 쓰라고 해서 썼습니다. 거기서 5개 버리고, 3개 버리고, 마지막 하나를 버러야 하는데, 제 아내한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저는 맨 끝에 제 아이들을 남겼습니다. 정말 고민됩니다. 아내와 아이 중에 선택을 해야 하는데, 이게 쉽습니까? 정말 자신에게 절실한 것 하나가 끝까지 남습니다. 그걸 가지고 소설을 써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구성을 해야 하는데, 그 기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동안에 제가 잠시 딴짓을 해서....메모를 하나도 못했네요. 강의 자료를 직접 살펴보세요(아, 무책임한 강의 후기 작성자입니다).

얼렁뚱땅 다음으로 넘어가서, 소설 작품 평가를 어떻게 할 것인지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서로 읽어주는 겁니다. 소설 속에서 꼭 확인해야 할 항목들을 체크리스트로 만들어서 제시하고, 그걸 가지고 아이들이 서로 돌려 읽게 하면 그 안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들이 다 정리가 되고 다듬어집니다.”

“쉽게 말해 ‘선생님 손에 피묻히지 말라’는 겁니다. 무얼 써보신 분은 알겠지만, 자기 작품에 대한 비난, 비판을 듣는 거 정말 가슴 아픕니다. 예전에 제가 시를 쓰면서 합평회에 나가본 적이 있는데, 제 작품 합평회를 하는 날이면 전날 밤에 잠이 안 옵니다. 제가 이럴 정도면 아이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건 서로 친구들끼리 돌아가면서 해야 아이들 마음에 상처가 적습니다.”

“그렇게 해도 제대로 소설이 다듬어집니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다 할 수 있습니다. <무지한 스승>이란 책에 나오는 말인데요. 교사는 교과서를 학생들이 스스로 이해하도록 자극하는 존재 그 이상이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교사는 그저 자극만 던지면 됩니다. 아주 심하게 말해서 교사는 몰라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이건 정말입니다. 아이들에게 동기부여만 할 줄 안다면 아이들은 스스로 배워옵니다.”

맨 마지막 문장이 탁 와닿습니다. 나도 모르는 걸 애들한테 어떻게 가르쳐? 하고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섰던 여러 수업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내가 아는 거니까 너희들에게 특별히 알려주마 하고 뻐기며 장광설을 풀어놓던 수업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자극제 이상이어서는 안 될 교사가 스스로를 높이고 높이던 그 부끄러운 수업들.

4. 마무리

강의가 일단락되고 질의 응답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작품이 어려워서 아이들에게 가르치기가 난감합니다. 무얼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렵다는 것은 그 작품을 교사가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겁니다. 유종호 선생님의 말씀을 빌자면, ‘시가 어렵다는 건 독시의 경험이 없다는 뜻이다’고 하십니다. 제가 답변을 드리자면, ‘응시하기’가 필요합니다. 작품을 읽고 읽고 또 읽으십시오. 수업 대상이 되는 text를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으면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들이 떠오릅니다.”

또다시 가슴 뜨끔합니다. 가르칠 대상을 ‘응시하기’ 이전에 참고서와 문제집과 자습서를 먼저 펼쳐본 것이 나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르칠 대상을 살펴보지 않고, 그에 대한 설명에 기대니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 할 수 밖에 없네요. 참고서와 문제집과 자습서를 쳐다보지 않은지 10여년이 넘어간다는 최용석 선생님의 말씀에 학교에 있는 제 책상이 떠올라서 무안했지 뭡니까.

아무튼 이럭저럭 ‘구라’와 ‘진실’이 오가는 최용석 선생님의 소설쓰기 강좌 후기를 마무리 지으려고 합니다. 역시 끝마무리는 좀 멋있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야겠지요? 연수를 들으시는 모든 분들은 아마도 지금 자신의 삶에서 좀더 나은 무언가를 꿈꾸시리라 생각을 합니다. 삶의 비전, 전망 이런 것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연수를 통해서 자신의 성장을 일구어가시는 것이겠지요. 그런 분들에게 최용석 선생님이 들려주신 문장 하나를 옮기며 마칩니다. 원래는 조벽 교수의 글에서 나오는 말이라네요.

비전, 비전이란 두 손에 꼭 움켜잡고 있던 것을 완전히 놓아버린 다음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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