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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옮긴글]우리모임 초대 회장이신 이원구선생님의 인터뷰가 민중의 소리에 실렸습니다.
조회 19
회원이미지안용순
2012-07-16 09:38:24
       
없음

 



이원구 선생은 꼿꼿하지만 부드러운 사람이다. 정년퇴직을 한 뒤에도 제자들이 그를 찾아와 수다를 떨고 가는 이유는 강직함 뒤에 숨어 있는 정겨운 마음씨 때문. 그의 교육철학은 예나 지금이나 교육자의 권위나 스승에 대한 존경심 이전에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우선이다. 그래서 그는 예순 일곱의 나이에도 많은 이들을 친구처럼 곁에 두고 있다.

이 선생은 술을 좋아한다. 엄밀히 얘기하자면 술이 좋아 마시긴 해도, 사람이 좋아 마시거나 사업을 하기 위해 마시는 술이 대부분. ‘전국국어교사모임’을 만들기 위해 활동했던 젊은 시절에는 술 때문에 꽤나 몸도 힘들었단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만난 교사들과 마음을 꺼내놓고 얘기하는데 술만 한 게 없어서다.

그와의 대화는 비 오는 날,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가면서 시작됐다. 기자의 손에 우산이 들려 있건만 그는 귀찮지도 않은지 자신의 우산을 기자에게 씌어주면서 "오랜만"이라고 먼저 말을 붙였다.

“저는 초창기 ‘말’지의 열렬한 애독자였는데, 이번엔 ‘민중의 소리’와 인터뷰까지 하게 됐네요. 감사드립니다. 작년에 우리 집 텃밭에서 수확한 옥수수 한 개에 수 백 개의 옥수수 씨알이 달려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이 옥수수를 개량해 기근이 든 아프리카와 굶주리는 북한에 보낸 어떤 생물학자가 기억납니다.(웃음)”

이원구

‘백년간의 비밀’의 저자, 이원구 선생



전국국어교사모임 창립, 들꽃 선생님 되다

이원구 선생은 1946년 전국 삼례 와리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넷째아들인 회안대군 이방간의 전주이씨 후손들이 전주유씨와 함께 집성촌을 이룬 제법 큰 농촌마을이자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집결지였다. 이곳에서는 송혜옥이 근동의 농민군 5,000명을 이끌고 갑오년에 봉기에 참여했다. 그 후 일제 때 와리 부락은 완주군 농민운동의 본거지였고, 해방 공간에서 민족자주, 통일 운동의 선봉에 섰던 곳이라 연좌제에 걸려 핍박을 많이 받기도 했다.

“외고조부는 전북 장수 지방의 부유한 유림인데, 동학농민혁명의 장수지역 주동자로 참여했다 고산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뒤, 민보군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했습니다. 외고조모는 남편의 시신을 밤에 장수의 봉황산에 암매장하고 전북 고부군 덕천면 신월리로 피신해 아들 하나를 양자 보내고 구차하게 살다가 그곳에 묻혔습니다. 그 뒤 그 후손들은 백제 후기의 별궁인 금마의 미륵산 근처로 흘러들어왔는데, 외조부는 특수한 쟁기를 개발해 부자가 됐지만 장남의 행방불명과 우익들의 행패로 쓰러져 집안이 풍비박산됐고, 자식들은 불행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한국전쟁 때도 이 선생의 집안은 사연이 복잡하다. 아버지의 형제 셋이 희생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 어려운 시기에 친 삼촌 셋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큰삼촌은 열사, 둘째 삼촌은 의용군, 그리고 셋째 삼촌은 학도병으로 전사했습니다.”

이원구 선생의 아버지는 무척 엄격하고 조용한 어르신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선생은 부모님께 별다른 걱정을 끼치지 않고 유순하게 자라 공고에 진학했다. 공대에 가라는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선생은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겹겹이 쏟아지는 아버지의 한숨과 불호령에도 자신의 선택을 바꿀 수 없었다.

“일종의 실존적 결단을 내렸던 거지요. 불교식으로 말하면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니 공즉시색(空卽是色)하고 싶었던 거랄까요. 단 한 번뿐인 삶을 영원화 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문학을 전공하게 됐습니다.”

이 선생은 1970년대 초 고등학교 교사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가족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교사로 일하면서 선생의 사명감을 깨닫게 됐다. 그 당시 학생들은 학내의 여러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여느 교사들과 다르게 폭력을 거부하면서 나름대로의 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그러다가 그는 광주항쟁을 지켜보면서 시인이나 작가의 명성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선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예수나 석가 같은 위대한 선생들이 인간을 크게 깨어나게 한 것처럼 진정한 교사는 학생들을 다소나마 일깨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초의 선생들은 학생 위에 군림했습니다. 국어 시간에 선생들은 일방적으로 설명하고 학생들은 그저 듣고 필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퇴직할 때가 되니까 학생들은 자유가 지나쳐 방종에 흘렀습니다. 선생이 좀 잘 해주면 저희들 마음대로 하고, 선생이 좀 엄숙하면 끊임없이 졸았으니까요. 진정한 사제관계가 무너져 교실이 붕괴됐다고 봐야지요.”

아울러 그는 건강한 인성교육과 함께 국어교육의 전문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전국국어교사모임’ 창립을 도왔고, 창립 회장이 됐다. 전국국어교사모임은 올바른 국어교육을 위해 1989년에 창립된 조직으로, 선진수업방법이나 학교문화를 교류하는 진보적인 연구 단체였다. 그에게 어떻게 하다 전국국어교사모임이 만들어졌고, 어떻게 하다 창립회장이 됐느냐고 물으니 고개부터 숙인다.

“저는 학생운동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투철한 교육관이 서 있는 사범대학 출신도 아니고 더구나 훌륭한 선생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좀 열성적이고 개혁적인 국어선생에 불과했는데, 당시 이름 있는 이수호, 김진경, 도종환, 이상석, 김은형 선생들보다 제 나이가 좀 위였거든요. 그래서 회장으로 추대를 받아 4년간 선생님들의 뒷바라지를 하게 됐습니다.”

그는 전국국어교사모임 활동을 하면서 민족문학교과서를 편찬에도 참여했다. 그 당시 국어 교과서는 미국의 신비평 이론에 바탕을 둬 좀 편향적이었다. 그 이론 대로라면 얼마든지 반민족적인 작가나 시인들의 작품이 교과서에 수록될 수 있었다. 그래서 주로 대학원 출신의 고등학교 국어 선생들이 중심이 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문학이론을 모두 포괄하는 ‘민족문학 교과서’를 편찬하는 모임을 꾸렸고, 거기에 대략 3년 정도 참여했다. 결국 친일잔재, 반공이데올로기 등 반민족적이고 정치적인 어용문인들의 작품을 제외하고 남북의 진정한 작품들과 한문으로 된 뛰어난 작품까지 폭넓게 수용한 실험적인 교과서, ‘민족문학’이 탄생했다.

그는 또 학교 내에서 뭔가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교내 ‘텃밭 가꾸기’가 가장 대표적인 실천이었다.

“1990년대 초에 학교는 지식과 교사 중심에서 생활과 학생중심으로 교육과정이 개편됐습니다. 국어도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중심으로 교과서가 혁신적으로 달라지고, 전교조 외관단체로 ‘전국국어교사모임’이 발족되면서 저희 학교에서 오래 전부터 해오던 특별활동, 학급문집 제작, 문학 활동, 답사여행, 교지 제작 등이 새로운 평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열린 교육의 하나로 학교의 빈 터에 텃밭을 만들어 학급에 분양하고 야생화를 기르는 일이 각광을 받게 됐습니다. 유월이 돼야 보리가 익듯이 모든 게 때가 있는 법이지만, 오래 전부터 저는 국어 시간에 참다운 인간이 무엇인지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요즘 대안학교에서 하듯이 말입니다.”

들꽃학교 문학시간

들꽃학교 문학시간

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시간이 얼마나 남으면 저런 일까지 하느냐?’는 비아냥이었다. 10여 년 간 동료교사, 아이들과 함께 텃밭을 가꾸고 100여종의 야생화를 길렀는데도 그를 아니꼽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이빨만 가지고 하는 교육보다 손과 발을 움직이면서 학생들과 함께 하는 인성교육이 가치가 있다’는 경험담을 수필집으로 묶어 출판했다. 그 책이 바로 ‘들꽃학교 노교사 교육희망을 보다’다. 그리고 그는 학교를 떠날 때가 되자 30년 동안 여학교에서 여성들의 자유를 위해 인간과 문학을 제대로 가르쳤는지 번민한 밤이 많았다. 그래서 가까운 제자들, 문학을 사랑한 제자들, 불행한 제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수필로 정리해서 퇴직하던 해에 ‘들꽃학교 문학시간’을 냈다.

요즘 젊은이들은 입시 걱정, 등록금 걱정, 취업 걱정 때문에 피가 말라간다고 한다. 35년의 국어교사, 67년의 삶이 던져주는 ‘힐링’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저는 비무장지대 철책에서 야간 잠복근무, 후방에서 진지 구축 작업, 높은 산에서의 피가 마르는 벙커작업, 그리고 소총부대 분대장을 하면서 냉혹한 군대문화를 3년간 경험해 보았습니다. 그 비인간적인 체험이 살아가는데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여러 도움을 주었습니다. 원시시대부터 어른이 되려면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의 대학생들의 대부분이 빚쟁이들이고, 주로 공무원이 희망직업이고, 돈이 없으면 결혼도 못한다는 현실적인 비극 앞에선 할 말을 잃어버리곤 합니다. 스웨덴 사람들이 어떻게 지혜를 모아 사회민주주의를 만들어 세계적인 칭송을 받는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인데 저 같은 국어 선생 출신이 무슨 깊은 이야기를 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쾌락과 고통은 형제간이다, 자잘한 욕심은 버리고 큰 욕심을 가지고 살자, 삶의 질을 깊게 만들자, 좀 고귀한 삶을 추구하자, 이런 말을 해 주고 싶습니다.”

소설 ‘백년간의 비밀’, 동학농민혁명을 기록하다

백년간의 비밀

백년간의 비밀

최근 이원구 선생은 소설 ‘백년간의 비밀’을 냈다. 이 책은 역적으로 몰린 동학농민혁명군의 후손들이 백여 년 간 겪은 수난과 항쟁,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계승해 그 명예를 회복한 이야기다. 이 선생이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백말 타고 열 두 하인을 거느린 외고조부가 장수에서 동학농민혁명군으로 떨쳐 일어나 공주 전투에 참여했는데, 전북 고산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고 장수에서 민보군에게 총살당했다는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삼례 와리 친가에서도 동학농민군의 후손인 친척들이 일제시대와 해방 공간에서 활약한 영웅담도 귀담아 들었습니다. 어린 저에게 그들은 활빈당을 조직해 탐관오리를 처단한 홍길동이나 임꺽정처럼 모두들 영웅으로 느껴졌습니다. 뒤늦게 그 이야기들이 지닌 역사적 사회학적 의미를 파악하고 가족사적인 비밀을 추적하여 소설로 집필하게 됐습니다. 저는 저희 집안의 가족사를 통해 우리 아버지들의 꿈과 이상을 조명하고 그 꿈을 갉아먹는 세력을 규탄하려고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이상은 어둠을 밝힌 스승, 즉 노자와 장자, 니체와 톨스토이, 크로포트킨과 바쿠닌, 그리고 신채호, 이회영, 박열처럼 일체의 권위와 권력을 거부하고 인류의 정의, 자유, 평등을 실천한 진정한 아나키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동학농민혁명군 후손의 가족사이며, 전북지방의 수난사이며, 인류의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구도적 탐구소설이다. 따라서 대부분 사실에 바탕을 두고 쓰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소설적인 재미를 위해 실존인물들의 분신과 가상의 인물이 다소 섞여 여러 복잡한 사건들을 전개했다.

“사실에 충실한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여건상 사실에 허구를 다소 섞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소설에서 사실과 허구를 밝히는 것은 의미 없는 일입니다. 실존인물이건 허구적인 인물이건 모두 작가가 재창조한 인물이니까요. 그리고 주동적 인물이건, 반동적 인물이건, 허구적인 인물들을 밝히면 재미가 없으니 고백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궁금증이란 늘 재미있는 놈이니까요.”

이 책에 담겨진 역사는 동학농민혁명, 항일투쟁, 한국전쟁, 남북이념 갈등 등 참으로 방대하다. 그런데도 이질적이지 않고 하나로 이어진다. 그의 문장과 구성의 실력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가 어깨에 짊어진 가족사적 사명감 같은 것도 느껴진다.

노란 부엉이들, 부활하다

노란 부엉이들, 부활하다

“동학농민혁명군을 철저하게 참살한 관군의 지휘관과 민보군을 조직한 지방의 유력자들은 대개 일제의 조선 지배를 수용하고 자기 가문을 지키고 자식 교육을 잘 시켰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반 이상 셋방살이를 하고, 친일파 후손들은 배경과 경제력을 이용해 떵떵거리면서 잘 산다는 말을 듣고 저는 크나큰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민족적인 사회주의자들이 적지 않게 명예를 회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궁핍한 그 후손들이 연좌제에 묶여 여러 제약을 당하고 있는 현실에서도 깊은 슬픔을 느끼고 있습니다.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을 서거 소식을 듣고 역시 슬픔과 함께 분노에 사로잡혀 그를 추모하는 시집 ‘노랑 부엉이들 부활하다’를 냈습니다. 그의 진정성을 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백년간의 비밀의 집필도 그런 감정에서 출발했습니다. 저희 가족의 역사가 과거로 사라져 묻히기 전에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진상위원회’처럼 그 진실을 밝히고 사과를 받은 뒤 서로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상처가 치료돼 상생하고 함께 번영할 수 있으니까요. 제 소설에 가독성과 감동력이 있다면 아마 그런 사명감이 작용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탐구적인 진지함이 먼저이고 문장력이나 구성력은 그 다음 문제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짧은 문장과 간결한 묘사로 문학성은 약화시키는 대신 역사 추리소설적인 구성으로 가독성을 높이려고 했습니다.”

그는 이 소설을 유연하게 전개하기 위해 역사학자가 문헌사료, 물질사료, 전승 사료로 역사를 기술하듯 진보적이고 탐구적인 국어선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그는 여러 증언을 기초로 문헌자료에서 그 내용을 검토하고 현장답사에서 재확인해 과거 백여 년 동안에 일어난 사건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복원했다.

“서사시 일리아드를 토대로 트로이 문명을 발굴한 고고학자 실리이만처럼, 구약성경의 니느웨, 시날이란 지명이나 노아의 홍수, 바벨탑의 전설을 근거로 이라크에서 고대 바빌로니아 문명을 발굴한 고고학자들과 비슷한 방법이었습니다. 이는 미국의 작가 헤일리가 ‘뿌리’에서 사용한 르포르타주 식 방식입니다. 헤일리는 외할머니에게 들은 전설을 사실로 믿고 직접 아프리카를 찾아가서 17살 때 백인 사냥꾼에게 사로잡혀 미국에 노예로 팔린 쿤타 킨테가 7대조 할아버지임을 확인했습니다. 미국에 돌아온 헤일리는 모계의 200년에 걸친 고달픈 삶을 기록문학적인 소설로 재구성해 천만 명 미국 흑인들이 짐승처럼 학대받아온 삶을 폭로해서 전 세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거든요.”

지난 100년간 동학농민혁명은 혁명이 아니라 ‘난’으로 불렸다. 하지만 2006년부터 특별법이 제정돼 동학혁명에 참가한 사람들은 명예가 회복됐고, 유가족들은 혁명군의 유족으로 인정받게 됐다. 이 선생의 소회가 남다를 듯싶다.

“비록 이름뿐인 명예회복이긴 하지만 그래도 역사를 변혁시키려다가 희생된 자랑스러운 혁명군 외고조부님을 두었다는 자부심으로 가슴이 뿌듯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역사는 정의, 자유, 평등 쪽으로 발전돼 나간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이원구 선생은 ‘백년간의 비밀’ 이후 오랫동안 연구해 왔던 ‘중동지방의 신화와 종교’ 얘기를 책 세 권으로 낼 계획이다. 이 책의 주제는 ‘죽음의 테크닉’으로, 이집트의 ‘부활의 기술’, 메소포타미아의 ‘순환의 기술’, 히브리의 ‘영생의 기술’이 각각 그 제목들이다. 그는 문헌 연구를 더 깊게 하고 현장답사를 하면서 마지막 수정 보완 작업을 할 계획이다.

만년 이 선생님, 아직 할 일이 많다.

이제 이원구 선생은 할아버지라고 불려도 어색하지 않을 나이가 됐다. 앞으로 그가 어떻게 노후를 이어나갈 지 궁금하다.

“얼마 전에 친구들과 함께 노인극장에 가서 옛날 영화를 본 뒤에 농담 삼아 제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노인들과 함께 놀지 말고 한 살이라도 더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자’고요. 저는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퇴직 후에 아내가 운영하는 요가교실에서 단전수련을 하면서 텃밭에서 채소를 가꾸고 있지만, 자그마한 대안학교도 만들고 싶고, 시집도 마지막으로 한 권 묶고 싶어요. 그리고 ‘중동지방의 신화와 종교’ 탈고가 끝나면 욕심을 다 털어 버리고 자연스럽게 돌아갈 준비를 해야겠지요.”

탈고의 과정이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는 중에도 그에게는 작가나 소설가 같은 호칭보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더 잘 어울려 보인다.

“저는 시인, 수필가, 소설가라기보다는 평생 중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친 국어선생입니다. 명함을 딱 한 번 만들어 본 일이 있습니다. ‘전국국어교사모임 회장’인데 제겐 과분한 칭호였지요. 훌륭한 국어 선생들이 얼마든지 있었거든요. 하지만 지금도 ‘이 선생님’이란 호칭이 제일 마음에 듭니다.”

<이동권 기자 su@v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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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이미지송승훈  2012-07-19 14:47   답글    
오오 이원구 선생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말씀에 무게가 있네요.
안 선생님 인터뷰를 옮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원구 샘 책을 사서 봐야겠습니다.
건강하세요 이원구 선생님, 후배 교사가 인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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