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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은희경, <태연한 인생>
조회 23
회원이미지심안
2020-03-10 05:15:04
       
은희경, <태연한 인생>

 

(앞부분의 내용 – 이웃들과 함께 단체 가족 여행을 떠나기로 한 상황. 막 출발하려던 순간, 와인 챙기는 걸 깜빡한 어머니는 다시 집에 들어가고, 어쩐지 어머니는 좀처럼 다시 나오지 않는다. 운전석에 앉은 이웃집 아저씨가 경적을 가볍게 울리자, ‘나’는 어머니를 모시러 다시 집에 들어간다. 어머니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전화를 받고 있었고, 통화가 끝난 후에도 멍하니 앉아서 움직이질 않는다. 나중에 ‘나’가 안 사실은, 그때 어머니가 받은 전화의 상대가 아버지의 내연녀라는 것. 어머니는 가족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아버지의 불륜 관계를 알게 된 것이다.)
 
여자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끊고 어머니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차에 시동을 걸고 어머니를 기다리는 일행은 한껏 들뜬 경적소리로 출발을 재촉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잠시 눈을 감고 자신이 맡은 배역의 감정을 잡은 다음, 어머니는 천천히 무대로 걸어 나갔다.
 
 


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이란 팟캐스트를 듣다가 알게된 구절입니다.
아버지의 외도를 알게 된 어머니가 태연한 척 가족 여행을 떠나는 장면인데, 김영하는 이 장면에서 ‘연극하는 자아에 대한 포착’이란 표현을 썼어요. 어머니는 여행 가기를 거부할 수도, 혹은 그 자리에서 바로 남편을 불러 사실 관계를 확인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며 자신이 맡은 배역-아마도 ‘현모양처’였을-의 감정을 잡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밖으로 걸어 나갑니다.

저는 얼마 전에 안경을 맞췄습니다. 제 인상이 소위 ‘세 보이는’ 얼굴은 아니어서, ‘엄격한 교사’의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일부러 맞춘 거예요. 뿔테는 너무 고리타분해 보일 것 같고, 그렇다고 세련된 무테를 쓰자니 가벼워 보일 것 같아서 반무테의 안경을 샀습니다. 이제 곧 새 학교에서 새로운 아이들과 처음 만날텐데, 어떻게 하면 ‘만만하지 않고 다소 무서운 선생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안경을 쓰기로 했어요. 그리고 까만색 코트도 샀습니다.

우리 삶 자체가 일종의 연극이고, 사회적 관계에 따라 내가 맡은 배역의 가면을 바꿔 써가며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여주면 참 편하고 좋을텐데, 그럴 수가 없네요. 새 학교에 처음 출근했던 날, 살며시 웃는 제게 어떤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박용배 선생님, 여기서는 애들 앞에서 절대로 웃으면 안 돼.”
아이들이 상당히 드세기로 유명한(?) 학교라 엄격한 교사의 모습으로 애들을 확! 잡아야 한다는 의미였어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떠오른 게 바로 은희경의 <태연한 인생>이었습니다.
곧 맞이할 개학에 저는 ‘엄격한 교사 박용배’의 감정을 잡은 다음, 천천히 교단 앞에 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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