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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 ‘저녁에’와 유심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분석적 읽기
조회 22
첨부파일
회원이미지홍완선
2012-02-01 16:15:55
       
교원대 대학원 2학기에는 임수만 교수의 시 강의를 들었다. 여기 글들은 그 과제 중 일부이다. 세 시간 강의 중 1시간 정도는 서로 좋아하는 시를 사연과 함께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 시간이 참말 좋았다.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전해야 할 시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 선생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북어대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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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김광섭의 후기 시들은 그가 젊은 시절 발표했던 시들에 비해 대중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는다. 환갑이 되던 해에 고혈압으로 쓰러진 시인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다시 살아난 이후, 예전과는 달리 보다 쉬운 언어로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산과 별, 비둘기와 교감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저녁에>를 비롯하여 <성북동 비둘기>, <산> 등이 그 좋은 예이다.
그 중 특히 <저녁에>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은 각별하다. 이산의 친구이자 추상화가인 김환기는 <저녁에>의 마지막 두 행을 제목으로 딴 그림을 그려 한국미술대상을 받았다. 이뿐인가, 대중가요 가수 유심초 역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곡으로 이 시를 노래하여 뭇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시 <저녁에>가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이 시를 노래하게 하고, 그림으로 형상화하게 했을까? 이 시가 지니는 매력을 분석적 읽기의 방법을 사용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생략과 반복, 병렬과 대칭의 측면에서 시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기서결 혹은 선경후정의 틀로 구조를 들여다 본 후, 중심 시어인 별의 상징성을 논해 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시 <저녁에>와 대중가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비교해 그 민요적, 불교적 수용 양상을 살폈다.
 
■ 생략과 반복, 병렬과 대칭의 구조
 

 

저녁에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연
 
 
 
2연
 
 
 
3연
 
 
 
 
저렇게 많은(별) 중에서하나가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사람 중에서(나 하나가) 그 별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밝음 속에사라진다
 
 
(밤이 깊을수록) 나어둠 속에사라진다
 
 
너 하나 나 하나는 이렇게 지금 (여기서 만나) 정답다, 그런데
 
 
(너와 나는앞으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저녁에>를 위 표와 같이 시구에서 생략된 어구를 괄호 안에 집어넣어 표시하고, 반복된 표현에 밑줄을 그어 그 내용을 확인했다. 그러자 1~2연에 진술된 문장이 거의 같은 문장 구조로 병렬되고 있으며, 다시 그 병렬의 중심에 하늘의 ‘별’과 지상의 ‘나’가 보기 좋게 대칭되고 있음이 쉽게 드러났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 저렇게 많은 A 중에서 A 하나가 B 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나 하나가) 그 별을 쳐다본다
→ 이렇게 많은 B 중에서 B 하나가 A 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진다
→ 밤이 깊을수록 A 는 C 속에 사라진다.
 
(밤이 깊을수록)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 밤이 깊을수록 B 는 D 속에 사라진다.
 
즉 1~2연에 담긴 총 7행의 시구는 아래와 같은 단 두 개 문장 형태의 반복이다.
 
이(저)렇게 많은 A(B) 중에서 A(B) 하나가 B(A) 를 내려다(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A(B) 는 밝음(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 대칭에는 저 하늘과 이 지상을 구분하는 ‘저렇게’와 ‘이렇게’가, 별의 ‘내려다’봄과 나의 ‘쳐다’봄이, ‘밝음’ 속에 사라질 수밖에 없는 별과 ‘어둠’ 속에 사라질 수밖에 없는 나가 자리한다.
그렇다면 1~2연 다음에 등장하는 3연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3연 역시 괄호와 같이 생략된 부분을 추가해 보면 아래와 같은 문장 둘로 구성된 연임을 확인할 수 있다.
 
너 하나 나 하나는 이렇게 지금 (만나) 정다웠다, 그런데
(너와 나는앞으로) 어디서 무엇이 되어 (정답게) 만날 수 있을까?
→ 너와 나는 지금(앞으로) 여기서(어디서) 별과 사람으로(무엇이 되어) 정답게 만났다(만날 수 있을까?)
 
이 두 개의 문장을 문맥에 맞춰 재구성하면, 다시 위와 같이 하나의 문장이 반복적으로 병렬되며 의미상 대칭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1~3연의 시행 전체를 축약해 재구성하면 아래와 같다.
 
이(저)렇게 많은 A(B) 중에서 A(B) 하나가 B(A) 를 내려다(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A(B) 는 밝음(어둠) 속에 사라진다.
너와 나는 지금(앞으로) 여기서(어디서) A 와 B 로(무엇이 되어) 정답게 만났다(만날 수 있을까?)
■ <저녁에> 속 기서결(起敍結), 선경후정(先景後情)
 
이 시의 문장을 위와 같이 세 줄로 축약했어도 시의 전체를 파악하기엔 부족함이 있다. 이 장에서는 <저녁에>를 기서결과 선경후정의 구조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저)렇게 많은 A(B) 중에서 A(B) 하나가 B(A) 를 내려다(쳐다)본다
 
1연에서는 너와 나가 별(A)과 사람(B)로서 존재하며 서로를 바라보게 됨으로써 만남에 이르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제목으로 미루어보건대, 이 둘이 서로를 인식하게 되는 시간적 배경은 저녁이며 야외의 공간으로 추정된다. 흐름상 시의 시상 혹은 모티프가 제시되는 ‘기起’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밤이 깊을수록 A(B) 는 밝음(어둠) 속에 사라진다.
 
2연에서는 시상이 훌쩍 전개되어 나아간다. 시간은 어느새 흘러 밤은 깊어져 새벽에 가까우며, 이에 너와 나는 별과 사람이라는 존재 조건 속에서 각각 밝음와 어둠 속에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이는 같은 시공간에서 숙명적으로 만난 둘이 또 다시 헤어질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2연은 앞 연의 시상을 이어받아 전개하여 나아가기에 ‘서(敍)’에 해당한다.
 
너와 나는 지금(앞으로) 여기서(어디서) A 와 B 로(무엇이 되어) 정답게 만났다(만날 수 있을까?)
 
3연에서는 1,2연과 달리 시상의 커다란 전환이 이루어진다. 너와 나, 별과 사람, A와 B의 만남과 헤어짐이 나타난 1,2연이 각각 기,서에 해당한다면 3연은 결(結)에 해당한다. 이 연에서는 시적 화자 ‘나’의 입을 통해 우리의 만남에 대한 인식을 토로한다. 비록 짧은 만남, 기약 없는 헤어짐이지만 분명 정다운 만남이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만남을 특별한 것으로 인식하는 태도는 다음 만남에 대한 희구로 이어진다. 즉 바로 뒤에 이어지는 의문형의 시행을 통해 너와 나는 앞으로도 어디선가 또 다른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기서결의 구조는 1~2연과 3연을 묶어 살펴볼 때, 선경후정의 짜임새로 이해할 수 있다.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선경후정(先景後情)이란 먼저 자연의 경치를 묘사하고 그 뒤에 그와 관련한 화자의 정서와 심사를 제시하는 한시의 시상 전개법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2연이 별과 내가 만나는 저녁에서 깊은 밤으로 이어지는 야외라는 시공간을 간략히 제시하고 있음을 돌이켜본다면, 이 두 연은 자연의 경치를 묘사한 선경에 해당한다.
 
이(저)렇게 많은 A(B) 중에서 A(B) 하나가 B(A) 를 내려다(쳐다)본다 → A와 B의 만남
밤이 깊을수록 A(B) 는 밝음(어둠) 속에 사라진다. → A와 B의 헤어짐
사실 시간적 배경이 되는 1연의 저녁과 2연의 깊은 밤 사이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으나, 시적화자인 ‘나’는 이를 자세하게 부연 설명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사연 혹은 서사는 생략되고 대신 나와 별, 시적 화자와 시적 대상에 대한 묘사를 간략한 서술어로 대신한다.
 
A(B) 하나가 B(A) 를 내려다(쳐다)본다
A(B) 는 밝음(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러한 1~2연에 이어지는 3연은 시의 흐름에 전환을 가져온다. 그렇다고 생략된 서사를 서술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시를 감상하는 독자가 이 부분을 채워넣기를 바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3연에서 제시되는 시적 화자의 정서와 인식이 이 텅빈 서사의 공간을 독자가 적절하게 채울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실제로 3연은 선경후정의 기본 원리에 맞게 나(A)와 너(B)의 찰나에 가까운 만남에 대한 화자의 인식과 정서가 본격적으로 제시된다.
 
너 하나 나 하나는 이렇게 (지금) (만나) 정다웠다, 그런데
(너와 나는앞으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정답게) 만날 수 있을까?
 
우연히 서로를 알아보고 만남에 이르렀으나,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 우리의 만남이 정다웠음을 토로하고 이 만남이 다음에 다시 이어지기를 안타까이 소망하는 것이다. 3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화자의 정서와 인식이 제시되고, 이를 통해 시 전체의 분위기나 이미지가 완성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위 시를 재구성하면 아래와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어느 저녁, 문득 누군가의 시선을 느낀 ‘나’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별들을 쳐다본다. 그러자 무수한 별들 중에 유독 하나의 별이 자신을 내려다보는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나 또한 지상의 그 무수한 사람 중 특별한 하나가 되어 그 별을 쳐다보게 된다. 그렇게 우연이라 부르기 힘든 인연으로 우리는 만난다. (1연)
밤이 깊어가면서 ‘별’과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별은 새벽이면 밝음 속에 사라질 운명이고, 사람인 ‘나’는 어둠 속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물며 인간 각자에게도 가야할 길이 있어 평생을 함께 한다는 것은 쉽게 꿈꿀 수 없는 일……. ‘나’는 운명처럼 만난 ‘별’과의 이별을 머리로는 이해하나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2연)
하룻밤 사이 잠시 만난 사이이지만 정다움을 담뿍 느낀 둘이다. 수십억의 사람 중 하나가, 수천억의 별 중에 하나를 수십 년의 삶에서 우연치 않게 만난 것을 알기에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말이 쉽지 않다. 그래서 ‘나’의 마지막 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담은 청유형이 아니라, 의문형의 문장이 된다. 그러나 이 문장은 화자의 의구심이 아니라 간절한 기원과 소망의 정조가 살포시 담겨 있다. 또한 어디서 무엇이 된다 하더라도 결국은 우리 다시 만날 것이라는 작은 믿음이 역설적으로 담기게 된다. (3연)
 
■ 별의 상징성
 
별은 암흑 속에서의 광명, 우주의 빛이자 하늘의 계시를 알려주는 존재이다. 별은 하늘에서 일정한 자리를 지키며 운행하기에 하늘의 이치 혹은 섭리를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별은 보편적으로 희망, 순수, 지조, 이상, 지고한 가치, 지향해야 할 이념을 상징한다.
윤동주의 <서시>에서 별은 지고지순의 가치 혹은 이념으로 상징화되어 시적 화자에게 부끄럼 없는 삶, 타인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이정표가 된다. 윤동주의 다른 시 <별 헤는 밤>에서의 별은 시적 화자가 지향하는 내적 세계, 즉 사무치게 그리운 과거의 추억에 다름 아니다. 또한 이산의 다른 시 <생의 감각>에서의 별은 시적 화자 자신이 우주와의 관계를 몸소 체험하도록 하는데, 이는 사실 우주가 현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서사 문학에서도 별은 다양한 상징을 지닌다. 알퐁스 도데의 소설 <별>에서 별은 목동의 눈으로 본 아가씨-아름답고 신비한 대상이자, 양치기의 순수한 사랑 그 자체이다. 중국의 <북두칠성 설화>는 스님이 잡아두었던 일곱 마리 돼지 이야기를 통해, 땅의 일을 별 즉 천제가 중재한다고 증언한다.
시 <저녁에>의 별을 알퐁스 도데의 <별>과 같이 인격적인 대상으로 해석할 때 참조할 수 있는 시는 이성선의 <사랑하는 별 하나>이다.
 
나도 별과 같은 사람이 / 될 수 있을까 / 외로워 쳐다보면 / 눈 마주쳐 마음 비쳐주는 /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중략)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 별 하나를 갖고 싶다
 
이 시에서 별은 직접적인 직유를 통해 드러나는데 그저 밤하늘에 홀로 반짝이는 존재가 아니라, 화자가 외로워 쳐다보면 눈 마주쳐주며 따뜻하게 위로를 건네는 존재이다. 3연에서 화자는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 별 하나를 갖고 싶다’며 직접적으로 자신의 바람을 드러낸다.
시 <저녁에> 역시 <사랑하는 별 하나>처럼 시어 별을 실제 밤하늘을 비추는 별만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해석이 더 적절하겠다. 즉 “이렇게 정다운 / 너 하나 나 하나는 / 어디서 무엇이 되어 / 다시 만나랴”의 ‘너’와 ‘나’를 별과 나로만 한정지어 생각할 것이 아니라, ‘별과 같이 빛나는 A’와 ‘그러한 A와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며 이별을 아파하고, 재회를 간절히 소망하는 B'라고 넓혀 해석하는 것이 온당해 보인다.
별을 변신 모티프 혹은 환생 모티프와 연결해 그 상징성을 이해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서 카시오페아 왕비는 메두사의 머리를 보고 돌이 되고 말지만, 제우스는 그녀를 하늘의 별이 되게 해준다. 동양에 널리 알려진 <견우직녀 설화>에서 견우와 직녀는 금지된 사랑에 빠진 벌로 견우성과 직녀성으로 변해 해마다 칠월 칠석이라야 만날 수 있다. 세계의 질서에 앞에선 무력하기만 했던 인간의 강렬한 욕망은 서사 속에서 변신과 환생을 통해 충족되는 것이다.
아서 클라크가 1955년에 지은 <동방의 별>은 기독교적 세계관이 바탕에 깔린 SF물이란 점에서 자못 흥미롭다. 소설 속 화자인 ‘나’는 불사조 성운을 답사하는 우주선의 일원으로 수석 천체물리학자이자 예수교 신부이다. 그는 다른 우주인들과 함께 초신성이 되어 은하 전체보다 더 밝게 우주를 비추고 사라진 별을 탐사한다. 그런데 그는 그 근처에서 인간보다 우수했던 외계 문명을 증언하는 기념비를 발견하고 큰 혼란에 휩싸이고 만다. 왜냐하면 베들레헴의 아기 예수에게 동방박사들을 이끈 동방의 별이, 바로 이 초신성이었으며 그 폭발로 인해 그 찬란한 문명이 파멸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서 클라크가 위와 같은 소설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NASA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할 만큼 우주에 대한 과학적 지식과 그에 바탕을 둔 상상력이 탁월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적인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은 아래와 같은 글을 통해 별에 대해 무지몽매한 우리 인식의 지평을 넓혀 주었다.
 
우주에는 은하가 대략 1000억개 있고 각각의 은하에는 저마다 평균 1000억 개의 별이 있다. 모든 은하를 합치면 별의 수는 1011×1011=1022개나 된다. 게다가 각 은하에는 적어도 별의 수만큼의 행성들이 있을 것이다. 이토록 어마어마한 수의 별들 중에서 생명이 사는 행성을 아주 평범한 별인 우리의 태양만이 거느릴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코스모스의 어느 학구석에 숨은 듯이 박혀 있는 우리에게만 어찌 그런 행운이 찾아올 수 있었을까? 우리의 특별한 행운을 생각하는 것보다 우주가 생명으로 그득그득 넘쳐 난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더 그럴듯하다.
 
하늘에 가득한 별의 무한함과 그 무한함으로 인해 오히려 불타오르는 실현 불가능한 인간의 욕망은 민요에 담긴 변신 혹은 환생 모티프, 더 나아가 불교의 인연설 및 윤회 사상과 연결해 생각해 볼 여지가 충분하다. 그에 대한 논의는 4장을 통해 더 이어가 보도록 한다.
 
 
■ <저녁에> vs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저녁에
- 김광섭 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유심초 작사․작곡․노래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저렇게 많은 별들 중에
별 하나가 나를 내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으로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너를 생각하면
문득 떠오르는 꽃 한 송이
나는 꽃잎에 숨어서 기다리리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나비와 꽃송이 되어
다시 만나자
 
이 장에서는 시 <저녁에>가 유심초의 노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통해 어떻게 재창작되고 대중적 향유의 대상이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심초의 노래는 기본적으로 시 <저녁에>의 상당 부분이 준용되었다. 1~2연에서 발견되는 시구의 소소한 변화는 오선지에 가사를 얹기 위해 글자수를 살짝 조절한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이산의 시에 덧붙여진 것 중 실제적인 의미에서 원시에 상당한 변화를 추동한 것은 4~5연의 밑줄 친 부분이다.
 
 
너를 생각하면 / 문득 떠오르는 꽃 한 송이 / 나는 꽃잎에 숨어서 기다리리
(이렇게 정다운 / 너 하나 나 하나는) / 나비와 꽃송이 되어 / 다시 만나자
 
시 <저녁에> 마지막 3연의 시행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의문형 문장의 형태로 재회에 대한 간절한 기원과 소망을 다소 소극적으로 담고 있다면, 대중가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냐랴>의 위와 같은 구절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이미지로 다시 만나고자 하는 욕망을 변신 혹은 환생의 모티프에 담아 직설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꽃과 나비’로의 변신 모티프는 어쩐지 낯이 익다. 구전 민요인 돈타령(양산도)과 판소리 춘향가를 함께 살펴보자.
 
 

 

돈타령(양산도)
 
돈돈돈 돈에 돈돈 악마의 금전
갑돌이하고 갑순이하고 사랑하다가
 
둘이 둘이 사랑하다 못살겠거든
맑고 푸른 한강수에 풍덩 빠져서
 
너는 너는 죽어서 화초가 되고
나는 죽어 훨훨 나는 벌 나비 되어
 
내년 삼월 춘삼월에 꽃피고 새가 울 때
당신 품에 안기거든 난 줄 아소서
 
 
 
춘향가
 
어어 어허 어허 어어 둥둥, 내 사랑이야. 너 죽어도 내 못 살고, 내가 먼저 죽거들랑 너도 부디 못살어라. 생전 사랑이 이럴진대 사후 기약이 없을쏘냐? (중략)
너는 죽어 꽃이 되되, 이백도홍삼춘화가 되고, 나는 죽어서 나비 될 적, 화간 쌍쌍 범나비되어, 네 꽃봉이를 내가 덥벅 물고, 바람 불어 꽃봉이 노는 대로 두 날개를 쩍 벌리고 너울너울 놀거드면, 나인 줄로 알려무나
 
* 이백도홍삼춘화 : 봄 석 달 동아에 피는 하얀 오얏꽃과 붉은 복숭아 꽃
* 화간 쌍쌍 범나비 : 꽃 사이를 쌍쌍이 날아다니는 호랑나비
돈타령의 갑돌이와 갑순이는 ‘돈’이라는 현실적 속박으로 인해 사랑을 꽃피우기가 쉽지 않자 결국 한강수에 몸을 던지는 비련의 주인공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에 일련의 희망이 담기는 것은 ‘꽃과 나비’로의 환생을 믿는 두 사람 혹은 3~4연에서 ‘나’로 분한 시적 화자의 태도 때문이다.
음악적인 면이나 사설의 측면에서나 민요의 영향을 크게 받은 판소리 역시 ‘꽃과 나비’로의 환생 모티프가 적지 않게 등장한다. 춘향을 향한 이몽룡의 사랑가에도 역시 ‘꽃과 나비’로 환생하여 전생의 못 다한 사랑을 이어가고자 하는 욕망이 분출하는 것이다.
민요와 판소리 사설에는 다른 사람, 다른 생물로 환생하여 이승에서 못다한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 하는 소망이 숨김없이 담겨 있다. 유심초는 이러한 민요적 전통 즉 변신 혹은 환생 모티프를 이어받아 이산의 시에 ‘나비와 꽃송이 되어 / 다시 만나자’는 그 굳건한 약속을 추가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민중의 욕구에 부합하는 민요적 낙관주의를 덧입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마지막으로 논의할 것은 시 <저녁에>와 노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에 배경화된 불교적 세계관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아서 클라크의 <동방의 별>에서 모든 인간, 더 나아가 우주 만물은 신의 섭리대로 움직일 뿐이다. 피조물들이 신의 위대한 뜻을 이해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기독교의 직선적 세계관은 하나님의 창조 → 피조물의 타락 → 하나님의 구속(회복)이라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이 길은 불교에서처럼 순환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반면 앞서 말했듯이 시 <저녁에>의 화자는 3연에서 ‘어디서 무엇이 되어서든 너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내었다. 이는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는 쉽게 나올 수 없는 진술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카시오페아 이야기 역시 기독교적 세계관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면에서 시 <저녁에>를 관통하는 것은 기독교의 직선적 세계관이 아니라 불교의 윤회 사상이며, 인연설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서든 너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소망과 희구는 노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에서 민요의 환생 혹은 변신 모티프와 쉽게 결합한다. 죽음과 운명을 넘어선 재회의 소망이 재생 혹은 환생을 통해 비로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생 혹은 환생의 모티프는 우리 민족이 본래부터 갖고 있던 정령숭배사상(애니미즘)과 전생, 현생, 후생의 삼세인과를 따르는 불교적 세계관이 조화를 이루는 내세관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실 불교에서 최상의 경지로 인정하는 것은 환생, 윤회조차도 벗어난 해탈이다. 그러나 불교 전래 이후 지금까지 한국인의 무의식에 깊숙이 뿌리박혀 토착화된 내세관에는 ‘해탈’ 보다 현생에 불가능한 소망, 금지된 욕망이 실현되는 ‘내생(來生)’이 똬리를 틀고 있다. 우리 문학사에는 이러한 소망이 이야기와 노래를 통해 긴 세월 동안 향유되어 왔다.
우리 시에서 발견되는 환생과 변신 모티프의 조합이 불가능한 소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강력한 욕망의 발현임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소월의 <접동새>이다. 이렇게 배경화된 불교적 세계관혹은 내세관은 민담 <며느리밥풀꽃>, 판소리계 소설 <심청전>, 고소설 <구운몽>으로 이어지다가 김광섭의 시 <저녁에>에서는 은연중에, 유심초의 노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에서는 보다 직설적이며 경쾌하게 드러난 것이다.
 
 회원이미지이영발  2012-02-01 23:19   답글    
유심초 노래 오랜만에 다시 들어봐야겠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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